오래전 쉬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국가정보기관 특수요원들의 이야기였는데 당시 새로운 분야의 영화이고, 많은 돈을 투자해 제작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람했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물고기가 쉬리입니다. 지방에 따라서 세리라고도 하고 버들피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쉬리의 특징은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것입니다.

하천 중, 상류의 물이 맑고 바닥에 자갈이 깔린 여울지대에 주로 사는데, 관상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쉬리는 맑은 물에서 살기 때문에 물이 혼탁한지 아닌지를 구분할 때 쉬리를 사용하는 것을 어느 과학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적당히 혼탁해야 물고기가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너무 정확하고 삶이 지나치게 깨끗하면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엊그제 흥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하는데, 살 수 있는 물고기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물에서 살 수 있는 물고기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쉬리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맑은 물에서 살 수 있는 물고기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혼탁한 물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맑은 물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혼탁한 세상을 합리화 시켜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혼탁한 세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쉬리와 같이 맑은 물에서 따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맑은 물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혼탁한 세상을 접하기는 하지만, 혼탁한 세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맑은 물에 대한 꿈을 가지고, 맑은 물에서도 물고기가 살 수 있다는, 살아야 한다는 꿈을 품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크리스챤들입니다.

/새하늘우리교회 장효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