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북항 친수공원 수로에 상어가 나타난 것은 지난 9월 18일이다. 흑상어 '부캉이'는 한 달 넘게 그곳에 머물렀고, 공원 누적 방문객은 16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평소 하루 2천 명 안팎이던 공원이라니, 상어 한 마리가 도시를 들썩이게 한 셈이다. 지느러미라도 한번 보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을 떠올리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일상에 이런 뜻밖의 손님 하나쯤 찾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지난달 말에 나온 『트렌드 코리아 2027』은 내년의 첫 번째 소비 트렌드로 '권태사회'를 꼽았다. 김난도 교수와 연구진은 자극이 넘치고 바쁘게 살면서도 좀처럼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심심할 틈 없는 세상에서 권태라니, 처음에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그런데 내 하루를 돌아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옷장은 가득한데 입을 옷이 없다는 '옷태기', 거울 속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태기'. 권태기라는 말이 일상 곳곳에 붙는다. 재미있는 것을 찾는 속도만큼 싫증 내는 속도도 빨라졌다. 새로 산 물건은 포장도 뜯기 전에 다음 물건을 기웃거리고, 여행지에 도착하면 벌써 다음 여행을 검색한다. 어느새 우리는 누리는 일보다 다음 즐거움을 찾는 일에 더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부캉이를 보러 나선 발걸음까지 권태 탓으로 돌릴 마음은 없다. 낯선 생명을 신기해하는 마음도, 온 가족이 나들이 나선 기쁨도 그 자체로 귀하다. 다만 즐겁게 보내고 돌아왔는데 어딘가 허전한 날이 있지 않은가. 실컷 웃었는데 이상하게 채워지지는 않는 날 말이다.
잠깐 쉬려고 휴대전화를 집었다가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을 때도 그렇다. 내려놓고 나면 쉬었다는 느낌보다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앞선다. 무엇을 그렇게 오래 봤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몸은 소파에 있었는데 마음은 쉬지 못한 것이다.
사람의 칭찬도 비슷하다. 듣는 순간에는 기분이 좋은데, 다음 날 누가 무심하게 대하면 어제의 칭찬은 힘을 잃는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죄는 아니다. 문제는 그 인정이 끊기면 나라는 사람까지 보잘것없게 느껴진다는 데 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 하니, 아무리 채워도 또 비어 버린다.
이런 생각 끝에 요한복음 4장의 우물가가 떠올랐다.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이 있었고, 그보다 먼저 길을 가시다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 계셨다. 대화는 "물을 좀 달라"(요 4:7)는 부탁으로 시작된다. 목마르신 분이 먼저 말을 건네신 것이다. 잠시 뒤 예수님이 생수를 말씀하시자 여인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요 4:11) 하고 되묻는다. 눈앞의 형편만 보면 당연한 질문이다.
예수님은 우물물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 아는 사실부터 짚으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요 4:13). 그리고 당신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이 된다고 하신다. 여인은 물을 얻을 방법을 묻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샘이 생기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훗날 요한은 이 생수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키는 말씀이었다고 풀어준다(요 7:38-39).
나는 이 차이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누군가의 반응을 확인해야 안심이 되고, 성과가 있어야 내 삶이 괜찮다고 느끼는 동안에는 늘 두레박을 내려야 한다. 오늘 받은 칭찬으로 내일의 불안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은 이렇게 날마다 조달해야 하던 내 가치의 근거를 바꾸어 놓는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이 삶의 바닥에 놓이는 것이다.
그 사랑은 막연한 위로에 머물지 않는다. 우물가에서 생수를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요 19:28)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생명을 내어 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길이 열렸다. 그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증명하지 못한 날에도 내 삶이 버려지지 않았음을 믿는 일이다. 세상의 평가가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얻어 내야 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나는 거기에 깊은 위로가 있다고 믿는다.
물론 믿는다고 매일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 믿은 사람에게도 지루한 오후가 있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그럴 때마다 신앙이 잘못된 것 같아 자책할 필요는 없다. 늘 새로운 감동이 있어야 제대로 믿는 것이라면, 신앙생활마저 끝없이 다음 자극을 찾는 일이 되고 만다. 평범한 하루에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2027년이 오면 또 새로운 유행이 생길 것이다. 갖고 싶은 것도, 가 보고 싶은 곳도 늘어날 테고, 그 즐거움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다만 새해의 유행을 챙기는 만큼, 오늘 내 마음이 무엇에 목말라 있는지 살피는 일도 소중하지 않을까. 누구에게 인정받아야 하는지, 무엇을 이뤄야 하는지 따지느라 정작 나를 아시는 분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고 지내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다가, 자기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겠다는 분을 만났다. 자기 힘으로 길어 올릴 생각만 하던 사람에게 먼저 건네 오는 생명이 있었다. 그 앞에서는 오래 애쓰던 마음이 조금 쉬어도 좋겠다.
물은 셀프여도, 구원은 셀프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