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미국은 경제공황과 노예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큰 소용돌이를 겪고 있었다. 미국 경제의 중심지였던 뉴욕 맨하탄도 다양한 이유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1850년대 뉴욕 맨하탄 하부 지역은 급격한 상업화로 출렁이고 있었다. 기존의 부유한 뉴욕 주민들이 쾌적한 주거지를 찾아 북쪽(Uptown)으로 대거 이주했고 도시 동공화(洞空化)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맨하탄 지역 교회들은 문을 닫거나 북쪽 주거지로 이전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88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올드 노스 네덜란드 교회(화란개혁교회)도 교인이 급감하며 존폐 위기에 직면했다. 올드 노스 네덜란드 교회는 자리를 지키기로 했고, 대신 지역 주민들을 직접 찾아가 전도하고 교회로 유치할 ‘가정 방문 전문 평신도 선교사’를 세우기로 했다.

   교회는 심방과 전도를 위한 평신도 선교사로 예레미야 란피어를 임명했다. 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전도 방문 경험도 없었던 의류 판매상인 란피어를 발탁한 것이다. 당시 교회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교회가 그를 선택한 구체적 이유는 오랫동안 맨하탄에서 사업을 해서 도심 직장인들과 상인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신앙과 성품이 좋았다.

   게다가 란피어는 활력이 넘치고 끈기가 있으며 태도가 겸손하였고, 기도와 권면(Exhortation)에 은사가 있었고, 음악적 조예도 깊어 찬송 인도도 탁월했다. 특히 란피어는 독신으로 지냈기에 가족 부양의 부담이 없었다. 그는 교회가 제시한 연봉 1,000달러 미만의 적은 사례비(당시 매우 적은 액수)를 수락하고 자기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전임 사역에 헌신했다.

   1857년 7월 1일 교회 평신도 선교사로 임명된 란피어는 가방에 전단지와 성경을 넣고 맨하탄 풀턴가 주변의 집, 상가, 하숙집을 가가호호 방문하였다. 하지만 수개월간 열심히 골목을 누비며 열심히 전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출석률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 란피어는 사역적 한계와 영적 무기력에 시달리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레미야 란피어는 골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던 중, “바쁜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기도하게 하자”는 지혜를 얻었고, 란피어는 이 틈새 기도회를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이것이 위대한 ‘정오 기도 운동’의 시작이다. 란피어는 ‘1857년 9월 23일부터 수요일 정오에 화란개혁교회 3층에서 정오기도회를 시작한다’라는 전단을 만들어서 뿌렸다. 9월23일 정오, 예정된 장소에는 실망스럽게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란피어는 혼자 기도했다. 그런데 그가 혼자 기도하는 동안 5명이 찾아와 6명이 함께 기도하며 첫 모임을 마쳤다.

   정오기도회 첫 모임은 미약했으나 점점 호전되었다. 다음 주에 14명, 그다음 주에 23명, 그다음 주에 100여명으로 불어나고 기도 열기도 뜨거워지자 매일 정오 기도회를 갖게 되었다. 이 기도회는 다른 도시로 번지기 시작했는데 1858년 봄에는 뉴욕주에만 매일 5만 명 이상이 모였고 모일 수 있는 모든 장소 즉 예배당, 극장, 소방서, YMCA에서 기도회가 열렸다.

   1857년에 시작한 기도부흥은 1959년까지 계속되었다. 기도회는 대도시는 물론 군소도시와 시골까지 확산하였다. 매사추세츠 주에 150개 지역, 뉴욕 200개 지역, 뉴저지 60개 지역, 펜실바니아 65개 지역, 오하이오 200개 지역, 인디아나 150개 지역, 일리노이 150개 지역, 미조리 50개 지역, 아이오와 60개 지역 등 동부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기도회가 열렸다.

   이 정오 기도회로 100만 명에서 200만 명의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로 돌아왔다. 유명한 부흥사나 큰 지도자가 동참하지 않았음에도 미국을 흔드는 부흥운동이었다. 이 정오 기도회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영적 각성 운동 중 하나인 ‘1857년 ‘영적대각성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우리도 이 시대를 이기기 위해 기도할 틈을 찾아 함께 기도하기를 사모한다!

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대표).
 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