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Photo : ) 신성욱 교수

[1] 독일 동화 작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는 『엔데가 읽은 책』(1996)에서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이 인생의 기로에 서서 고민할 때, 아주 적절한 순간에 아주 적절한 책을 들고 아주 적절한 부분을 펼쳐서 지금 당신에게 꼭 필요한 답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겠는가?”

[2] 『천년의 독서』(시프, 2023)의 저자 미사고 요시아키(三砂慶明)는 우리가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내게 꼭 필요한 한 권의 책을 만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매일 새로운 책이 입고되어 수없이 많은 책 속에 놓여 있는데, 운명과도 같은 그 책을 내가 손에 들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책은 용케도 깊이 숨어 있다가 운명의 그 사람에게 어느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

[3] 이게 바로 책과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다. 일본의 영화감독·배우·에세이스트로 유명한 이타미 주조(伊丹十三)가 이런 말을 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서점의 서가 앞에 서면, 필요한 책은 알아서 튀어나온다. 책이 나를 불러주는 것이다.”
그의 말에 나 또한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다.

[4] 내게도 한 권의 책과의 소중한 만남이 우연처럼 다가온 경험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 명단이 발표되는 시기가 되면 우리나라는 울상이 된다. 또한 그 시즌이 되면 언제나 우울해지는 서울대이다.
왜 우리나라는 노벨상 수상자가 많지 않은 것인가?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주입식 교육’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 달달 외워서 얻은 지식은 시험이 끝나고 나면 싹 잊어버린다. 한편 호기심과 흥미를 가지고 배운 지식은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 입시 위주의 암기를 위한 독서로는 독서에 관심을 가지게 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일본 나다고등학교(灘高等学校)의 교사 하시모토 다케시의 국어 수업을 나는 매우 귀하게 생각한다.

[6] 그는 일본 문부성이 지정한 교과서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나카 간스케(中 勘助)의 소설 『은수저』(1921)를 자체 교재로 삼아 3년에 걸쳐 읽는 수업을 했다. 그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국어를 좋아하는지를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5%는 싫다’와 ‘5%는 좋다’, 그리고 ‘90%는 싫지도 좋지도 않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3년 후 조사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번엔 ‘95%가 국어가 좋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7] 90%가 국어가 싫지도 좋지도 않다고 답했던 이들이 어째서 95%가 국어를 좋다고 답했을까? 그 이유는 ‘놀이처럼 배우는 것이 인생 최고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배울 때는 수동적으로 마지못해 하지만, 놀 때는 열의를 갖고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국어는 사람을 세우고 국가를 세우기 위한 뼈대이다. 하시모토가 행한 수업으로 국어를 좋아하게 된 학생들은, 무명이었던 나다교를 ‘도쿄대 합격률 1위’로 끌어올렸다.

[8] 책에는 운명을 바꿀 만큼 큰 힘이 있다. 시대와 장소와 언어와 상관없이, 읽기 전과 읽고 난 후의 세계가 확 달라질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나쁜 책이든 좋은 책이든 그것이 끼치는 위력은 대단하다.
1925년 독일에서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사실 왜곡과 정치적 선동으로 가득한 이 책이 팔리지 않으리라 예상한 출판사는 초판을 500부밖에 찍지 않았다.

[9] 하지만 출판사의 예상을 뒤엎고 이 책은 세상을 확 바꾸어 놓았다. 저자의 유명세에 힘입어 그의 책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40년에는 무려 570쇄를 기록하며 누계 700만 부를 돌파했다. 저자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이고, 책 제목은 『나의 투쟁』(1927)이다. 이 책은 훗날 나치 정권의 핵심 정책인 ‘유대인 박해’와 ‘아리안 인종 우월주의’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10] 아울러 ‘유대인 차별 정책’, ‘강제수용소’,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토양을 형성하기도 했다. 반면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도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약 1억 4천만 부 이상 판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왕자』는 “성공보다 관계, 소유보다 사랑, 숫자보다 존재”를 가르친 매우 선한 책이다.
이처럼 한 권의 책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11] 결국 문제는 얼마나 많이 읽느냐가 아니라, 어떤 책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한 사람의 생각은 한 시대의 방향을 바꾼다.' 왜곡된 사상은 역사를 어둡게 만들지만, 사랑과 책임을 가르치는 책은 인간을 깊어지게 하고 세상을 밝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을 선택할 때 더욱 신중해야 한다. 오늘 내가 펼치는 한 권이, 내일의 나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