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에스겔 3장은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에게 내리신 명령 가운데 가장 불편하고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특히 3장 1-3절에 지배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한마디는 이해하기가 무지 어려운 내용이다. “두루마리의 말씀을 먹으라”라는 말씀 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본문을 피하곤 한다.
하나님은 “두루마리의 말씀을 연구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2] “암송하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선포하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먹으라.”
겔 3:1–3에서 하나님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가득 기록된 두루마리를 에스겔에게 주시며 그것을 먹으라고 명하신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명령하신다.
[3] 원문은 “אֱכֹל אֵת אֲשֶׁר תִּמְצָא, אֱכֹל אֶת־הַמְּגִלָּה הַזֹּאת”이다. 번역하면 “네가 발견하는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겔 3:1)이다.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 ‘אָכַל’의 기본 의미는 ‘먹다, 삼키다, 소비하다’이다. 단순히 ‘맛보다’가 아니라 ‘완전히 섭취하여 자기 안으로 들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히브리 사고에서 먹는 행위는 ‘동화(assimilation)’를 의미한다.
[4] 히브리어에서 먹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행위가 아니다. 먹는 것은 자기 존재 안으로 흡수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טַעֲמוּ) 알지어다”(시 34:8)와 “주의 말씀을 내가 얻어 먹었사오니…”(וָאֹכְלֵם)(렘 15:16)는 구절을 보라.
예레미야 역시 말씀을 “먹었다”라고 표현한다.
[5] 이는 ‘지적 이해’가 아니라 ‘존재적 체화’를 의미한다.
무얼 먹으라는 것인가? ‘두루마리’(겔 2:10)인데, 이는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공식 문서’를 뜻한다. 그런데 거기엔 ‘위로’나 ‘축복’이 아니라 “애가와 애곡과 재앙”(קִינִים וָהֶגֶה וָהִי), 즉 ‘심판과 슬픔’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읽으라’가 아니라 ‘먹으라’고 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또 다른 표현이 하나 있다.
[6] 원문 “וּמַלֵּא אֶת־מֵעֶיךָ”은 “네 배(창자)를 채우라”라는 말씀이다. ‘מֵעֶה’는 ‘창자’ 혹은 ‘내장’을 말한다. 이 단어는 히브리 사상에서 ‘감정과 깊은 내면의 자리’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말씀을 머리에 넣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면 깊은 곳, 존재의 중심’을 채우라고 하셨다.
선지자는 단순 전달자가 아니다. 그 자신이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말씀(메시지)과 존재(메신저)는 분리될 수 없다.
[7] 메신저는 메시지를 편집할 수 없다. 완화할 수도 없다. 수정도 불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 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의 말씀을 선지자가 먹으니 “그것이 그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3:3b)라고 했다. 메시지의 내용이 위로나 축복이 아니라 심판과 슬픔인데 어째서 꿀 같이 달았단 말인가?
[8] 히브리어 동사 ‘מָתוֹק’는 감각적 단맛을 말하지만, 구약에서는 종종 ‘기쁨과 만족’, ‘하나님의 선하심’을 표현하는 상징어이다. 시 19:10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 여기서 ‘달콤함’은 ‘내용의 부드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심판의 메시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선지자에게는 기쁨이다.
[9] 에스겔은 이제 고독한 길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듣지 않을 것이고, 그는 거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았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기쁨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에 있기 때문이다. 심판을 전하는 것은 무겁지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은 달콤하다.
이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요 4:34)이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연결된다.
[10] 또한 두루마리는 단순한 재앙 선언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심판은 죄를 드러내고, 거짓 평안을 깨뜨리며, 회복을 위한 정결 과정을 시작한다. 즉, 심판은 ‘언약적 사랑의 다른 얼굴’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진짜 두려움이지, 말씀으로 징계하시는 것은 아직 관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안다. 이 심판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복시키시는 그분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11] 그 사실이 그를 달콤하게 한다.
오늘 무엇이 나를 달콤하게 하는가? 맛있는 산해진미인가? 아첨하는 입술인가? 자랑하는 입술인가? 만사가 형통해서인가?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로 인한 것인가?
오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ㅠ 대하고 있는가? 읽고 연구하고 토론하고 암송하기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말씀을 먹어서 말씀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