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십일조에 관한 논쟁이 거세다.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에 신약 시대로 십일조의 의무는 끝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간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대신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란다.
예수님이 40일 금식까지 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왜 금식할 필요가 있느냐며 금식 무용론을 주장하는 어떤 목사의 궤변과도 흡사하다.
[2]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신앙의 원리까지 없앴다는 의미는 아니다.
십일조의 핵심은 ‘얻은 재물의 비율’이 아니라 ‘감사의 인정과 고백’이다.
십일조의 정신이 뭔가? 내가 얻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
[3]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1/10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아니던가. 그걸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은 각자가 하나님께 취해야 할 행동이다. 그것까지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해주실 수는 없는 일이다.
1/10은 물론이요, 3/10, 아니 9/10까지 하나님께 바치는 이들도 존재한다.
신앙은 보수가 좋다. 믿으려면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최상이다. 신앙의 모범이 있다면 그런 이의 신앙을 본받는 것이 유익하다.
[4] 9/10조의 정신을 생활화 한 케이스가 있다. 우선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20세기, R. G. LeTourneau라는 중장비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사업 초기에 큰 실패를 겪고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비록 절망적인 형편이긴 했으나, 그때 그는 이런 결단을 한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10%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90%를 드리고 나는 10%로 살겠다.”
[5] 그는 수백 개의 교회와 선교 단체를 후원했고, 기독교 대학(LeTourneau University)을 설립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돈을 대신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90%를 드렸지만, 사업은 오히려 더 번창했다고 한다.
이번엔 영국의 예를 들어보자.
[6]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의 경우다. 처음 그의 연 수입은 30파운드였다. 그때 그는 28파운드로 생활하고 2파운드를 드렸다. 수입이 300파운드로 열 배 늘어났을 때도 생활비는 거의 늘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90% 이상을 구제와 선교에 사용했다.
그의 재정 원칙은 세 문장으로 요약된다.
“가능한 한 많이 벌라. 가능한 한 적게 쓰라. 가능한 한 많이 나누라.”
[7] 웨슬리에게 십일조는 율법적 의무가 아니라 청지기로서의 최소 기준이었고, 사랑의 실천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그는 십일조를 “끝”으로 보지 않고, “시작점”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모범을 소개해 보자. 영락교회 원로 목사였던 방지일 목사님의 케이스이다. 유학 시절, 시카고에서 그분을 두어 차례 뵌 적이 있다. 그분은 평생 사례비 대부분을 선교와 구제에 사용하셨다.
[8] 매우 검소하게 사셨고, 개인 통장에 거의 잔액을 남기지 않으셨다. 사역 말년에는 사례비의 80~90% 이상을 선교사 후원과 구제 헌금으로 사용하셨다.
방 목사님은 평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 통장은 비어 있어도 괜찮다. 하늘 창고가 차 있으면 된다.”
눅 16:1-13절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다.
[9] 주인이 자신에게 두 번씩이나 손해를 끼친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청지기 직에서 완전히 쫓겨나기 전에 자신이 주인에게 쫓겨난 이후의 미래를 재빨리 준비했다는 점이다. 세상 불의한 청지기도 그렇게 지혜로웠다면, 의로운 하나님의 청지기들이야 얼마나 더 확실하게 영원한 미래를 준비해야겠느냐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이들은 그저 헌금을 많이 한 신자들이 아니었다.
[10] 그들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미래를 위해 재물을 흘려보낸 이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복음 사역을 위해 준비한 재물들은 천국의 곳간에 영원히 저축되었다. 지금 그들은 그곳에서 그것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을 것이다.
남은 것은 우리 차례다.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