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에서 태어나 정치범수용소 출생자로는 최초로 탈북에 성공했던 신동혁(25) 씨가 윌스트리트 저널 기고를 통해 수용소의 참상을 알리며 탈출하던 자신의 가족들의 처형장면을 강제로 목격한 경험을 전했다. 신 씨는 이 기고문을 통해 “수감자들이 더 이상 침묵 속에 죽어가서는 안 된다”며 수용소의 반인륜적 행위에 국제사회가 항의할 것을 촉구했다.

신 씨는 “북한에서는 범죄자의 가족은 3대에 걸쳐 반역자로 분류돼 투옥된다”며 “한국전쟁 때 아버지의 형제 두 명이 대한민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은 체포돼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각각 다른 곳에 수용됐고, 어머니의 수용이유는 정확히 모른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수용소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부모님이 열심히 일한 결과로) 드물지 않게 결혼을 허락받았다”며 “이것이 나와 형이 수용소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전했다.

그러나 신 씨는 “수용소 내에서는 허가받은 가족도 서로 애정을 갖지도 못했다”며 “14살 때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기도한 죄로 체포됐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투옥돼 7개월 동안가족 탈출을 공모했다는 것을 털어놓도록 강요받고 심하게 고문당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고문으로 등에는 흉터가 생겼고 그 때를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특히 가족들의 공개처형 강제 목격에 대해서는 “어머니와 형은 1996년 11월 29일 반역죄로 공개처형됐고 나는 현장에 끌려나와 그들의 죽음을 보도록 강요받았다”고 끔찍한 인권 실상을 알렸다.

탈출 과정에 대해서는 “2005년 1월 2일 탈출을 감행하는데 나는 성공했지만 동료는 철책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고 그는 그렇게 죽은 것 같았다”고 설명하면서 “북한에 있을 때 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오직 공포만이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매 맞는 공포, 굶주림의 공포, 고문의 공포, 죽음의 공포였다”고 강조했다.

수용소의 참상과 관련 “지금 이 순간도 북한의 수용소에는 수 만명이 고통받고 있다고 한 끼라도 더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풀, 나무뿌리, 진흙, 쥐, 곤충 등으로 연명하고 있다”며 “공개되는 무자비한 고문과 매질 가운데 여성들은 종종 낙태가 강요되고 태어나는 어린이에게도 어린시절이란 없다”고 전했다.

그는 “수감자들은 지능과 감정이 없는 짐승으로 취급받고 있다”며 “우리가 북한 수용소의 학대행위에 맞서야 한다. 수감자들이 더 이상 침묵 속에 죽어가지 않도록 인간성을 말살하는 폭력에 항의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대변해야 한다”고 국제여론 조성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