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사 클론(Lisa Clon)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웅진지식하우스, 2024)라는 책 29페이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은 음식 없이 40일을 살 수 있고, 물 없이 3일을 살 수 있지만, 의미 없이는 35초도 살 수 없다.”
이 말은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 생존을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님을 얘기한다. 동물은 먹고 자고 번식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2]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버티게 하고, 다시 내일을 마주하게 하는 힘은 단순히 음식이나 물과 같은 생리적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의미’이다.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에 본능적인 욕구 충족만으로는 살 수 없다. 아무 어려움 없을 것 같은 풍족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이유가 뭘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의미 없는 삶엔 반드시 깊은 고독과 허무가 찾아온다.

[3] 그런 허무는 때로는 죽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꿈 하나로 버티며 웃을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면서도 공허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생존과 삶 사이에는 바로 ‘의미’라는 절대적인 벽이 존재한다. 짐승과 달리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내 삶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늘 묻는다.

[4] 철학자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끝까지 붙드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답을 가진 사람만이 절망을 이겨 낼 수 있었음을 본다.
‘의미 없이는 35초도 살 수 없다’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단 몇 초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잃으면 무너진다. 기다리는 누군가, 이루고 싶은 무언가, 나를 지탱하는 신념 하나가 없다면 우리는 숨만 쉬는 껍데기와 다를 바 없다.

[5] 어떤 철학자는 삶의 의미를 ‘자기를 넘어서는 가치에 몸을 바치는 것’이라 말했고, 또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순간 견뎌낼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극한의 환자 병동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은 단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버텨야 할 이유’, ‘살고자 하는 명분’, ‘그들에게만 주어진 고유한 의미’ 말이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풍요롭다.

[6] 음식도 물도 넘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살률은 높고 우울증은 시대의 질병이 되었다. 이는 인간이 단순한 물질적 생존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직장에서 성공해도, 재산을 쌓아도, 명예를 얻어도 그것이 삶의 의미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여전히 목마르다. “왜 나는 이 일을 하는가? 내 삶은 어디를 향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잃는 순간, 우리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 같은 상태에 빠진다.

[7] 이 삶의 의미를 던져주는 학문이 철학이요 종교다. 물론 철학엔 한계가 있다. 굶어 죽어도 삶의 의미와 가치만 찾는다면 버틸 수 있게 가르쳐준다. 하지만 철학은 거기까지다. 영원한 생명의 의미를 알려주지 못한다. 수많은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절대자인 신이 없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책이 없다. 이것을 속 시원하게 채워주는 유일한 종교가 바로 기독교다.

[8] 기독교는 생명 없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려주는 생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공동체인 기독교가 세인들로부터 ‘개독교’ 소리를 듣고 있다. 2012년 북한에서 탈출하여 휴전선 넘어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을 지나 세 개의 철책을 넘어 귀순한 ‘노크 귀순 병사’가 있다. 남한 초소에 노크했지만, 아무도 나오질 않아서 다른 초소에 노크했더니 한참 후에 우리 군인 한 명이 나왔기에 '노크 귀순 병사'가 된 것이다.

[9] 귀순이 아니라 경계도 서지 않은 채 철책이 뚫린 것이 밝혀지자, 국방부 장관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한동안 매스컴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에 넘어온 지 2년 만에 예수를 믿고 우리 학교에 입학을 했다. 월요일 밤마다 내 방에 와서 복음을 배우고, 인문 고전 독서 훈련도 받았다. 학부를 졸업한 후 총신 신대원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은 사랑의교회 북한 담당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10] 학부 시절 어느 날, 내 방에 온 그의 입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교수님, 저는 예수를 믿은 이후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해서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심히 의심스러워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을 했다. “어째서 자살하는 유명인 대부분이 교회 다니는 크리스찬인지요? 어째서 교회는 그 사람들 자살하지 못하게 막아주지 못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아요.”

[11] 똑똑한 질문이었다. 평소 내가 한국 교회를 향해 늘 비평하던 내용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 질문의 답은 뭘까?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할 교회나 목회자들이 참 복음을 제대로 못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타 종교와 별 차이 없는 ‘율법적이고 도덕적인 내용의 반쪽짜리 복음’(Half gospel)만 알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참 복음과 완전한 복음'으로 인한 삶의 기쁨이나 행복을 맛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2] 영원한 세계가 아닌 이 땅에서만이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살아갈 이유가 있겠거니와, 만일 영원한 세계에서 찾고 누리게 될 최고의 의미까지 알게 된다면 그 어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렌지색 옷을 입은 채 IS에 의해 참수당한 많은 순교자들이 배도 한 명 하지 않고 담대하게 죽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영원한 의미'를 찾고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게는 그런 ‘의미’가 있는지 점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