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해마다 한 해를 하나의 짧은 문장이나 단어로 표현하여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기발함을 보이는 기관들이 있습니다. 그중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는 2024년 올해를 '브레인 롯(Brain rot)' 이라 명명했습니다. 이것은 뇌가 멍해지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직역하면 뇌가 손상되거나 썩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단어는 올해 특히 소셜미디어에서 저품질 온라인 콘텐츠를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을 우려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 새롭게 주목받았다"고 했습니다.

BBC는 "브레인 롯”이란 단어를 사용한 빈도는 2023년에서 2024년 사이에 230% 증가했다"며 "인스타그램 릴스와 틱톡에서 무심코 몇 시간씩 스크롤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브레인 롯”에 시달리고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교수요 심리학자인 앤드류 프레스빌스키(Andrew Przbylski,1953 - )는 이 단어의 인기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증상"이라고 평했습니다. 저는 이 극히 사소하거나 그저 평범한 콘텐츠들을 무료함 속에 긁적거리는 과도한 소비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정신적, 지적 상태가 악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위협감을 느낍니다.

이런 시대 속에 저물어가는 한 해를 뒤돌아보며 필자는 우리의 찬송 중 마음으로 꼭 붙들고 싶은 찬송을 하나 소개하려 합니다. 그것은 찬송가 81장 “주는 귀한 보배(Jesus Priceless Treasure)” 입니다.

이 찬송은 작시자인 요한 프랑크(Johann Franck,1618-1677)에 의해 1641년 만들어 졌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잔혹한 전쟁 중 하나인 독일의 30년 전쟁(1618-1648)이 시작된 해에 태어나 성장 과정 속에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조기에 사망하는 모습, 소유물들의 손실, 경제적 빈곤,등 다양한 종류의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직업이 변호사였던 프랑크는 이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오직 예수, 그분은 귀중한 보배” 로 고백하며 그에게만 진정한 소망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안전과 평화, 그리고 “가장 순수한 즐거움”이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를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게 합니다. .

이러한 영감이 넘치는 시를 1653년 그의 친구인 요한 크루거(Johann Crüger 1598-1662)가 작곡하여 1653년 루터란 찬송으로 출판하게 된 것입니다.

작곡자 요한 크루거는 이 소망의 시를 단조로 표현하며 역설의 소망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조건에서 성 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며 우리를 구해주실 것이란 확신 속에 나타난 기쁨과 소망을 슬픔의 멜로디로 승화하려 했던 것입니다.

한편, 교회음악의 아버지라 일컫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는 이 곡을 바탕으로 해서 그의 세 번째 모테트 “예수, 나의 기쁨” Motet e minor BWV 227 "Jesu, meine Freude",1723)을 작곡 하여 이 곡과 텍스트를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필자는 이 찬양의 역사를 연구하며 이 곡의 작시자 요한 프랑크, 작곡자 요한 크루거, 그리고 이 곡을 가지고 더 아름다운 음악으로 승화시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이 세 사람이 당시 처해있던 환경. 즉,독일의 30년 전쟁, 그리고 그 이후나 오늘날의 환경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생각되었습니다. 종류가 좀 다를 뿐 고통의 모습은 결국 똑같아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가졌던 통찰력은 분명히 달라 보였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환경을 초월하여 “주는 귀한 보배, 참 기쁨의 근원, 참된 내 친구. 갈급한 내 마음 주를 사모하여 목이 탑니다. 흠이 없는 어린양 그 품 안에 괴롬 없어 더 바랄것 없네” 라고 고백하며 그것을 영감의 멜로디로 작곡하여 후대 크리스천들에게 남겨지게 했던 그 통찰력이 필자에게는 대단한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찬양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문화를 외부 환경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조금씩 사라져 버리게 하는 위협감을 느끼게 합니다. 다윗왕 이후 부터 전통적으로 구별되이, 공교하게 찬양을 준비하여 예배에서 하나님께 드리라고 지정한 찬양대 문화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편리함을 추구하는 실용주의 (Pragmatism),나 소비지향적 (Consumerism) 사조에 휘말리며 점점 사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로 찬양대가 예배 이후 연습하러 들어가면 전도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찬양대를 없애게 되었다는 조국 대한민국에 어느 목사님의 인터뷰를 보며 필자는 마음에 큰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칭송하고 높이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사43:21)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의 찬송에는 이런 오래된 찬송가 “주는 귀한 보배(Jesus Priceless Treasure)”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놀랍도록 변하고 있어 보이지만 그 내면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인간의 두려움과 불안은 세대를 거쳐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전 세대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통찰력이 오직 그리스도 복음으로 인해 바르게 확립되어야 합니다. 즉 모든 환경에서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소망임을 확인하며 예배와 찬양을 위해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일구어 놓은 아름다운 전통들을 잘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조부모와 조상보다 모든 것을 더 잘 안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