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로 가려 하시는 길에 빌립을 만난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르라”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크게 흥분하였고 하나님의 나라와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때를 기다리고 있던 나다나엘을 찾아가 외쳤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요1:45) 그러나, 나다나엘의 반응은 싸늘했다. 왜냐하면, 빌립이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요1:45).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당시 나사렛은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 도시가 아니었다. 구약성경이나, 탈무드나 유대인들의 어떤 글에도 언급된 적이 없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메시야와 이 깡촌 시골마을을 연결하는 것은 억지스럽고 우수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다나엘 뿐 아니라, 어느 유대인들에게도 ‘메시야’와 ‘나사렛 예수’ 사이에는 인식 부조화의 영역이 존재한다. 나사렛과 메시야는 구약 유대교와 신약 기독교인들의 메시야 패러다임들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와서 보라!”는 인식부조화의 영역, 이해할 수 없는 것의 경험으로의 초대이고 도전이다.
인식론들의 한계
근대 이후의 인식론은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크게 나눈다. 데카르트는 근대정신에 생기를 불어넣은 합리주의의 전형이다. 그는 수학적으로 명석판명한 진리,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모든 사유판단의 근거가 되는 명제를 찾고자 하였다. 그것이 바로 “Cogito ergo sum!”이다. 데카르트에게 존재의 확실성은 Cogito를 통해 경험된다. 이성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발견하였고, 그 진리를 토대로 신의 존재도 논증가능하게 된다. 이성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신)에 대한 개념을 증명한 후에는 신은 우리를 속이지 않기 때문에 저 밖에 펼쳐진 세상도 우리가 경험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데카르트의 신존재증명은 사유하는 존재 자체의 유한성을 통해 선험적 절대존재(신)를 증명한다(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 유한에서 무한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불완전한 존재에게서 완전의 개념은 스스로 나올 수 없는 것이기에, 재미있게도 이성은 철저한 자기 유한성의 인식안에서 신(神)인식의 정당성을 얻는다. 합리적 의심은 유한한 존재의 자기증명인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속에 있는 완전! 그 선험적인(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닌 본래적으로 우리안에 존재하는) 것의 진리 경험은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증명 가능한 것이기에 테카르트에게 합리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은 당연하다. 유한한 존재에게 완전을 경험하게 해 줄 수단이 바로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와 다르게 경험론자들은 경험에 앞서는 선험적 판단자체를 부정한다. 인간은 백지(Tabula rasa)상태로 태어나 경험을 통해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지, 경험에 선행되는 개념들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경험이란 감각지각에 대하여 우리 마음의 반성을 통하여 습득된다. 즉 모든 참된 인식의 원천은 감각이다( F. 코플스톤, 『영국 경험론』, 이재영, 서광사, 1991). 합리주의자들이 외부세계와 경험 초월적인 사태들에 대하여 증명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경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라면, 경험론자들에겐 아직 나다나엘에게 “나사렛 예수”와 같은 것이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반문하는 자의 경험세계를 넘어서 있다. 신존재를 증명하려는 이성은 성공할 수 없다. 논증의 역사는 신존재 증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가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은 증명할 수 없다. 나사렛 예수를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이로 경험하는 것은 우리 인식론의 체계안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경험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지만, 빌립은 ‘나사렛 예수’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인식론
나다나엘에게 “나사렛 예수”는 합리주의자들에게는 증명 불가한 논증이며, 경험주의자들에게는 선험적인 지식없이 경험될 수 없는 어떤 것과 같아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반응이 당연하다. 그러나, 빌립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통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 거기에는 분명 성령이 선물하는 누미노제의 희열이 있었을것이다. 그래서, “와서 보라!”외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참된 인식론의 정점에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11:1). 합리적 추론이 열망하는 것의 실재이고, 감각 지각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의 증거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합리적 추론이나, 감각지각을 통한 지식으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빌립은 자신의 합리적 이성이 절대화한 통념의 체계,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현실적 가치체계 너머의 것을 직접 경험하였다. 빌립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소리를 들었고, 나사렛 예수는 그에게 믿음을 주었다.
“와서 보라!”
믿음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길을 가던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하신 것처럼 믿음은 누군가가 나를 먼저 “와서 보라!” 불러야만 일어나는 신비이다(사 45:4). 우리를 저 멀고 거친 인식의 땅끝에서부터 불러 세우신 분이 계시다. “나는 너를 땅 끝에서 데려왔다. 먼 곳에서 너를 불러 세우며 일렀다.”(사41:9)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바로 그 비상한 (Extraordinary)것의 경험은 잘못된 인식체계, 오염된 가치체계에 갇힌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신 그 분을 경험하는 환희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엡2:5-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던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의 실재를 “나사렛 예수”로 추론하고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오직 가서 직접 보는 수 밖에는 없다. 그래서, 빌립은 “와서 보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나다나엘도 우리도 “나사렛 예수”앞에서 우리의 철옹성같던 인식의 체계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와서 보라!” 그렇게 우리도 전혀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초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따르라!”는 나사렛 예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이 원고의 내용은 전적으로 저자의 것 입니다.
Rev. 방삼석 교수(Ph.D): 센트럴신학대학원 한국부 조직신학 조교수(겸임) & 신학분과장
달라스 뉴라이프 선교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