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타주로 여행을 다녀오신 후 제게 자랑삼아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번에 여행을 하던 중 들른 교회의 목사님이 목사님을 잘 아신다고 합니다!”

여행 중에 본인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을 아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왔으니 얼나마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곳에 저를 아는 목사님이 계시다니 고마운 일이지요. 그런데 그 목사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지만 그 집사님이 전해주는 목사님의 성함은 제게 전혀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인데 그 목사님은 집사님에게 저를 잘 알고 아주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하니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라 제 자신이 참 난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일을 경험한 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일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아는 것으로 인식해버립니다. 객관성을 배제한 체 주관적으로 아는 것 만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내가 아는 것으로 믿어 버립니다. 하지만 무엇을 알고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가 나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심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자녀를 제대로 아는 부모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서로 잘 안다고 믿고 살지만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부부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들이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자기는 안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서로를 잘 모르는 것은 흉이 아닙니다.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 어떤 사람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번에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다른 사람들은 나를 잘 모르고 자기들 마음대로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나를 따라 다닌 너희들은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고 물으신 것과 같습니다.

이 물음 앞에 제자들의 대표로 나선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따르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고백한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복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제대로 아는 것이 복입니다.

좁은 이민 생활을 조금 오래 하다 보면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 아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합니다. 어디서 부딪혔고, 무슨 일로 사업상 관계를 맺었으며, 어느 단체에서 함께 일을 했고, 어떤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상대방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이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고 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고 믿어 버립니다. 그러다보면 잘못 입력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는 나로 하여금 상대방을 향해 그릇된 선입관을 가지게 만들어 버리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할 것은 나만 잘못 알고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릇된 정보를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하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전에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일도 알고 보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연예인을 잘 아는 것처럼 과장함으로 인해 빚어진 비극입니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느 기업인에 대해 함부로 말을 했다가 결국 그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일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서 잘 알지 못함으로 인해 크고 작은 비극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제대로 알고자 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알면 이해할 수 있고, 제대로 알면 사랑할 수 있고, 제대로 알면 용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이해해야할 사람을 오해하고, 사랑해야할 사람을 미워하고, 용납해야할 사람을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서로를 제대로 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세대차이를 핑계로 대화를 하지 않게 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상대방을 제대로 알려고 애쓰지 않으며 성격차이를 이유로 서로를 용납하려는 시도를 포기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를 제대로 알려고 먼저 노력하지 않으면 서로의 눈에 비친 자그마한 다름이 함께할 수 없는 틀림으로 오해 받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 ‘반 풍수가 집 안을 망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어설프게 알면 자기는 물론이고 상대방에게 까지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경고의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분명히 ‘아니요' 하라고 가르칩니다. 제대로 알고 용납하고, 제대로 알고 거부하라는 말씀입니다. 제대로 영그는 과실들을 보면서 우리의 제대로 아는 것을 통해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모름을 통해 새롭게 배우는 기쁨이 넘치는 이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