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앗시리아 제국과 이사야의 조언[2]: 히스기야 시대의 국제관계.
히스기야는 아하스가 죽은 후 715년부터 단독 통치를 시작하여 687년에 이르기까지 29년 동안을 통치하였다. 아버지와의 공동통치 기간 동안 앗시리아의 왕은 디글랏빌레셀 3세, 살만에셀 5세, 사르곤 2세였으며, 705년 사르곤 2세가 죽기까지는 친 앗수르 정책을 유지하면서 국제관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유다왕국과 앗시리아의 관계는 형제나 부자 관계로 맺어지는 외교적으로 동등한 상호관계(reciprocal relationship)가 아니라, 종주권자와 봉신(vassalage) 사이의 상하관계(hierarchical relationship)였다. 더구나 강력한 앗시리아는 엄중한 주인이 되어 유대왕국을 굴종적 노예처럼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지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주권자인 왕의 죽음은 국제정치 상황을 타개하려는 봉신국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1. 이사야의 히스기야를 향한 정치적 조언의 배경.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722-705)가 죽고 난 후, 중근동의 여러 나라에서는 억압적 앗시리아에 대한 반역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앗시리아와 유대의 수직적 국제관계에 부여된 과도한 조공의 임무는 종주권자인 사르곤 2세의 죽음과 함께 히스기야에게도 도덕적인 가책이 없이 앗시리아ㆍ유대의 주종관계를 해소하는 결정적 기회가 되었다. 이는 당시 팍스 앗시리아카의 허상을 알려주는 것이며, 히스기야가 사르곤의 죽음 이후에 왕이 된 산헤립에게 저항을 한 것도 그간의 봉신국이 당한 상황을 고려하여볼 때 충분히 이해할만한 귀결이다.
이사야가 국제관계에 대하여 히스기야 왕에게 전한 신탁은 매우 엄중한 국가의 위기 상황 속에서 주어진다. 히스기야가 그 주변국과 함께 취한 반 앗시리아 연대는 이집트와 구스, 블레셋, 두로와 시돈, 에돔과 암몬, 그리고 유대왕국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산헤립 원년인 705년이 지나며 산헤립이 바벨론을 비롯한 주변의 반란 세력을 평정하고, 결국 703년경에 즈음하여 노골적인 저항을 하는 제국의 남부 유대왕국과 주변의 반 앗시리아 국가들의 집단적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산헤립이 701년에 출정을 본격화시켰다. 산헤립은 해변의 페니키아를 석권하여 시돈, 악십, 악고와 같은 성읍에서 상실한 권위를 되찾았고, 암몬, 모압, 에돔 지역의 왕을 다시 복속시켰다. 아울러 블레셋 영역의 아스돗을 복속키시고, 저항하던 아스글론 왕을 앗수르로 추방하며 불러들였다. 에그론의 지원 요청에 응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연합군이 왔으나, 산헤립의 대적이 되지는 못했다. 유다의 견고한 성읍 46개가 산헤립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히스기야는 국가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산헤립 군대를 철수시켜달라는 간청과 함께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의 공물을 부과받는다. 히스기야는 결국 굴욕적인 패배를 인정하고, 성전 문과 기둥에 입힌 금과 은을 모두 벗겨내어 산헤립에게 준다. 아울러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을 꺼내어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에게 항복을 표하는 공물로 전달한다.
그러나 제공된 공물의 효과는 얼마 가지 않는다. 아하스의 시대에도 동맹 관계를 불사하고 유대왕국까지 공격한 앗수르의 전례처럼, 산헤립의 군대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다의 봉신국의 위치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산헤립의 군대는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강권한다. 유대왕국이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 때, 히스기야는 사망으로 이끄는 중병이 들어 개인적인 난관을 동시에 경험한다. 절망의 때에 히스기야는 벽을 향하여 심히 통곡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사 38:3)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오히려 히스기야를 고치고 앗시리아에 대한 승리를 확증하신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15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 38:5-6). 이사야의 히스기야에 대한 발병과 기적적인 치유의 말씀은 반 앗시리아 연대의 중심적 구성요소인 유대의 왕 히스기야를 강화시킬 뿐 아니라, 항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굳건한 의지를 주었을 것이다.
2. 이사야의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
이사야에 소개된 앗시리아와 유대의 전쟁은 아직 구스와 이집트의 군대가 패퇴하기 전, 히스기야 왕이 이집트 동맹에 대한 일말의 소망을 가지던 때로부터 시작된다. 선지서와 역대기의 기록에 의하면,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아직 유대의 라기스 포위 공성전을 진행하는 중에 자기의 신하를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종용한다. 총지휘관 다르단(Tartan), 랍사리스와 더불어 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한 랍사게가 바로 아하스 왕이 이사야의 계시를 받았던 장소, “윗못 세탁자의 밭 곁에 있는 대로”에 진을 치고 유대왕국의 당국자를 향하여 모욕적인 회유를 한다. 유다의 궁내대신 엘리야김,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史官) 요아가 나가서 랍사게의 모욕적인 회유를 청취한다. 두 번에 걸쳐서 주어진 랍사게의 연설(사 36:4-10, 12-20)에서 첫 번째는 유대의 왕과 귀족을 향해서, 두 번째는 큰소리로 유대 군민을 향하여 주어졌다.
산헤립의 심복으로 술관원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랍사게의 연설 내용은 엄중한 심리전이었으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 신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첫 번째 랍사게의 연설은 유다 지도부의 모든 신뢰가 완전히 무용하다는 주장이다. 랍사게의 주장은 유다에게 싸울만한 계략과 용맹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말뿐이며, 갈대 지팡이와 같은 이집트를 의뢰함도 헛되며, 여호와를 향한 신앙도 헛되다는 주장이다. 랍사게는 나아가 여호와의 이름을 참칭하며, 자신이 여호와의 지시를 받고 전쟁하러 왔음을 주장한다. 이는 랍사게의 거짓 예언이다.
둘째로 백성을 향하여 전달된 산헤립의 이름으로 외쳐진 연설은 히스기야 왕에게 미혹되지 말라는 것, 항복하면 풍성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랍사게는 성 위의 백성을 향한 연설을 통해 또다시 백성에게서 여호와 신앙을 해체하려 한다. 열국의 신 중에서 산헤립의 군대를 막아 성읍을 구한 신이 없는 것처럼, 여호와도 예루살렘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는 주장이다(사 36:18-20).
히스기야가 부왕 아하스와 다른 점은 언약의 종주권자인 하나님을 실재하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보고 믿었다는 점이다. 랍사게의 말을 전해 들은 히스기야 왕은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간다. 아울러 히스기야는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을 보내어 선지자 이사야의 기도를 간청한다.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향하여 예언하기를 앗수르 왕의 종들이 여호와를 능욕한 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소문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 그가 본국에서 죽게 될 것을 예언한다(사 37:5-7).
산헤립이 라기스를 함락시키고 립나를 공격할 때, 당시 애굽을 석권한 구스왕 디르하가가 앗수르 왕과 싸울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 산헤립은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자신의 편지를 히스기야에게 전한다. 이 편지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산헤립의 군대를 막을 수 없다는 모욕적인 독신(瀆神)의 내용이다(37:8-13). 이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은 편지를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 펴놓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훼방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였다(37:14-20).
사람을 보내어 전달한 이사야의 계시는 상당히 길게 제공된다(37:21-35).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산헤립을 열국을 정벌하는 도구로 삼았으나, 오히려 그가 태초부터 이 일을 계획하고 집행하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알지 못하고, 그를 향하여 분노함으로 산헤립과 그 군대를 심판하리라는 것이다. 그 심판의 내용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화살을 쏘지도 못하고, 공성전을 열지도 못한 후에 퇴각하리라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산헤립과 그 온 군대는 18만 5천의 군대가 괴멸적 타격을 입고 회군하게 된다(37:36-38)
3. 이사야의 국제정치적 조언.
기원전 8세기 후반,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시대가 국제관계에서 위기의 시대라는 것은 분명하다. 유대왕국과 그 주변의 국가들은 앗수르가 국제무대로 부상(浮上)함에 따라, 소위 “안보 위기”혹은 “안보 딜렘마”(security dilemma)를 겪는 상황이었다. 중근동의 크고 작은 국가들은 이합집산의 행동을 통하여 안전과 평화를 추구하였다. 히스기야에 대한 이사야의 조언은 국제관계의 기본적 원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시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리는 유대왕국의 정체성과 관련된 흔들리지 않는 언약에 대한 강조점이다. 유대왕국의 변함없는 기조는 유대왕국이 여호와의 언약으로 구별된 정체(polity, 政體)라는 점이다. 유대왕국은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 관계에 있는 나라이다. 신명기적 관점에서 보면, 유대왕국은 여호와의 제사장 국가이며 봉신국의 위상을 가진다. 이같이 독특한 입장은 국제정치에서도 실재하시는 왕이신 여호와를 섬김으로 하나님과 맺은 거룩한 언약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독특한 입장은 유대왕국이 주변 강대국과의 대외정책으로 모든 국제관계를 환원시킬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종주권자로 삼아 의지하고 주변 제국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기초적인 봉신국의 의리이다.
흥미롭게도,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국제관계에 있어 이사야의 조언은 분명하게 친 앗수르 정책이나 반 앗수르 정책을 기조로 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제관계에 대한 현실적 분석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인 유대왕국이 국제관계로부터 초월하거나 국제관계를 무시하도록 인도되지는 않는다. 아하스는 친 앗시리아 정책을 히스기야는 반 앗시리아 정책을 취하였으나, 중요한 논점은 언약 국가인 유대왕국이 그의 자주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이는 여호와에 대한 신뢰와 자주적 외교정책을 기본적인 요소로 한다는 점이다. 왕은 누구라도 국제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하며, 히스기야는 이 점에 있어서 신실했다.
국제관계의 정체성 유지가 중요한 이유는 유대왕국을 비롯한 당시 각국의 국가적 정체성이 신학적 정체성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중근동의 다양한 나라들은 이미 자국의 대표적인 주신(主神)을 섬기고 있었다. 다른 나라와의 종주권 계약이라는 관계 속에서는 타국의 종교와 제의를 받아들이고, 타국의 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수입할 수도 있었다. 이사야서에서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이유는 바로 이 영적인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왕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갈등하는 외교적 파당의 도움을 따라, 아하스는 앗수르의 종교와 예식을 수입하였으며, 여호와 신앙의 정체성을 버렸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신명기적 언약으로 복귀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왕의 중대한 정치신학적 역할은 그 나라가 섬겨야 할 종교를 선택하는 강력한 영향력의 행사이다. 이러한 면에서 유다와 왕과 왕의 주변에 있는 세력의 도움으로 왕국의 종교적인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왕과 주도적인 권력자들의 결정은 그러므로 여호와 앞의 경건 혹은 우상숭배와 배교를 왕복하는 가능성으로 남겨졌다. 아하스에서 히스기야로의 정치신학적 전환은 이러한 면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