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한편의 그림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영향을 주었던 빛의 화가로 불리는 네덜란드 출신의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를 통해 20세기 기독교에  가장 혁신적인 영향을 준 네덜란드 출신인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을 변화시킨 일 입니다.

파란만장한 생을 지내며 인생의 가장 깊은 협곡에 빠져있던 렘브란트는 1669년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해서 자기 내면을 "탕자의 귀향"으로 그려냅니다. 그리고 1983년 나우웬이 프랑스 "토르즐리" 라는 작은 마을에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라르쉬(L' Larch) 에 머물던 중 문득 벽에 붙여놓은 포스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그가 처음 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 한 장의 포스터 앞에서 나우웬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깊은 내면을 건드리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용솟음쳐 올랐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 그림의 원본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우웬은 렘브란트 그림 포스터를 처음 만난 지 2년 만에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내려놓고 죽는 날까지 캐나다에 있는 "라르쉬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 지적 장애인들 돌보며 생을 살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그림 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모습은 아버지와 방탕하다 돌아온 탕자인 작은 아들과의 포옹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두 사람의 그 모습에 못마땅해 하는 큰아들의 따가운 시선을 보게 됩니다. 이 그림을 통해 나우웬은 자신의 삶을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대학교수의 일을 정리하고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것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두 팔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 이었습니다.

그것은 구경꾼에서 주인공이 되는 일이었고 회개를 가르치는 자리가 아닌 회개하는 죄인의 자리에 사는 것이었으며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과정 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품, 그곳은 "그토록 들어가기를 원하면서도 두려워서 차마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자리 였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모습을 보며 나우웬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과 렘브란트가 바로 나의 회심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들려주시고 그렸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님 자신이 작은 아들이자 곧 큰아들이라는 사실 역시 더욱 분명해집니다"이 말을 빌려 필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하시는 장면을 보며 그 안에서도 나우웬이 말한 예수님의 두 모습 즉, 큰아들과 작은 아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은 사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을 뺀  마태, 마가, 누가 저자가 공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중 누가가 기록한 말씀을 통해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 옵소서 " 라는 장면을 봅니다.

이 장면은 마태나 마가 저자의 기록에 비해 비교적 온순하게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마태와 마가 저자는 예수님이 그 말을 하기 전에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사오니"라는 격한 감정을 표현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큰  아들과 같은 불평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어 작은 아들의 모습처럼 아버지께 주권을 맡기는 모습을 표현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두 모습 속에서 바로 나우웬이 말한대로 예수님의 큰아들, 그리고 작은아들의 양면성을 연상하게 됩니다.

한편의 그림이 이처럼 많은 메시지를 주듯 하나의 짧은 음악이 드라마로 펼쳐지며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혜영 작곡가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에 찬 이 감람산에서의 모습을 음악으로 잘 스케치하여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당시 긴박했던 겟세마네 동산의 현장을 가까이에서 보는 듯 또렷하게 비추어 줍니다.

크게 세 가지 장면을 조명하게 됩니다. 먼저 겟세마네 전경의 모습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는 듯한 모습을 연상하게 하기 위해 단조로 서주를 시작 합니다. 이어 먼 곳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유니슨으로 비춥니다. 이어 카메라 앵글을 클르즈 업해서 현장을 선명하게 보이게 하는 듯, 같은 가사를 반복하고 네 파트로 성부를 나누어 예수님의 기도 장면을 가까이에서 보게 조명해 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엇박자를 사용하여 땀이 핏방울 되듯 하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의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어 유니슨으로 대조를 사용하여 평화로운 어린양을 묘사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두 마음을 그려놓습니다. 하나는 "나의 아버지여 이 고통의 쓴잔을 내게서 멀리하게 하소서" 라고 외치며 큰아들의 모습과같이 불평이 섞인 항변 같은 모습을 그려냅니다. 다른 하나는 작은아들이 주는 고백처럼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며 죽음으로 온 세상 구원할 어린양이 되겠다는 저항 속에 순종을 보여주는 장면을 음악으로 그려냅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장면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약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펼치신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를 통해 그 십자가 고통, 그리고 돌아가심을 감사로 겸손하게 받아들이신 인간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나우웬이 램브란트가 그린 한 폭의 그림을 통해 모든 삶이 바뀐 것을 보여주듯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장면은 오늘을 사는 우리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하나의 도전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