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1932년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溥儀)를 집정(執政)으로 추대하여 '만주국'을 건설한다. 일제는 1937년 7월7일 만주 병참기지 건설을 계획하고 요녕성 심양, 단동일대 16개 현, 간도지역 23개 현에 조선인 1만호씩 매년 강제 이주시킨다. 그 결과 1941년에서 1944년 사이 조선 농민 6만4,887명이 중국동북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1930년에 60만 명에 달했던 한인(韓人)의 인구가 1940년에는 1백45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일제는 조선인 사립학교 관리를 강화하여 조선인에게 인문과목 보다 기술과 실업과목을 장려했다.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역사와 조선어 교육을 금했다. 조선인을 일제의 2급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이었다. 급기야 일제는 조선인 사립학교 100개교 이상을 폐교한다.
조선인 인권보호 및 반일 시위운동
1912년 이상용, 이회영, 허혁은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길림성 동남부에 위치한 통화현(通化縣)에 그 본부를 두고 민사(民事), 형사(刑事) 등 모든 조선인의 법률문제와 민족간의 분쟁을 담당하여 조선인 인권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3월1일,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시작해 한반도 전지역과 전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중국동북지역에서도 3월과 4월 중 14만여 명의 조선인이 독립운동시위에 참가한다. 5월12일에는 경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길림의 조선인 청년 학생들이 대중과 함께 길림성 의회 앞에 집결했다. 1919년 3월부터 5월 중순까지 연변의 4개 현에서 도합 50여 차례의 반일(反日)집회와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10만여 명에 달했다. 이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1919년 4월11일, 상하이에서는 '3.1 독립선언서'와 '3.1 운동'에 기초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미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었고, 같은 해 국내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외에 국내외 8개의 전단정부(傳單政府)가 수립되자 이를 통합 할 필요를 느껴 1919년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대한국민의회'를 개헌형식으로 흡수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명실공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1924년과 이듬해인 25년 하반기 사이에, 동북지역에서도 각 항일 민족주의 단체들이 3개의 부(府)로 조직을 통합해 조선인의 인권을 보호하며 항일 독립운동에 힘을 모았다. '참의부'는 공화정 체제의 정권을 수립하였고, '정의부'는 의회정치의 삼권분립 형식을 취했으며, '신민부'는 김혁을 교장으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500 여명의 별동대와 보안대를 편성했다. 삼부(三府)는 중국 정부에 그 자치권을 승인받지 못해 정책을 수행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 채 정부로서가 아닌 하나의 단체로서 활동했다. 비록 삼부가 조선인 자치권을 쟁취하지 못했지만, 동북지역 조선인 반일(反日) 근거지 형성을 위해 노력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해방이후, 동북지역 조선인
1945년 일본의 패전 직후, 항일운동지도자나 독립운동가들은 속속 한국에 귀국했다. 그러나 가난한 농민들은 그동안 지어 놓은 농작물을 추수하지 못해 떠날수 없었다. 이렇게 망설이다가 머물게 된 사람도 있고, 경작지를 재분배하고 조선인을 소수민족으로 평등하게 대우해 주겠다는 중국공산당의 약속을 믿고 돌아가지 못한 농민도 상당수였다. 연변에서 태어나 장년이 된 조선인 대부분은 연변에서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려고 떠나지 못했다. 남한에 고향을 둔 조선인들은 세계정세가 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 갈 수 없었다.
소련군이 1946년 3월7일부터 중국 동북지역에서 철수하자 같은 해 4월부터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은 요녕성에서 본격적인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이때 한인들은 토지개혁을 비롯한 소외 계층과 소수민족을 지지하는 모택동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을 도와 해방전쟁에 참여한다. 한인들이 국민당에 대항해서 공산당을 지지한 이유는 국민당은 한인(韓人)을 차별하여 한교(韓僑)라 부르며 귀국을 종용한 반면, 공산당은 일찍이 한인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국민당과 결탁한 토비(土匪)들이 양민들을 약탈할 때 한인들은 공산당과 함께 대항했다. 한가지 안타까운 일은 중국공산당에 편입되면서 독립운동의 성격이 중국을 돕는 활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인구비례로 볼 때, 중국의 56개 민족 중에서 한인(韓人)은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신중국을 건설하는데 공헌을 많이 세웠다. 연변을 위시하여 동북3성 전역에서 해방전쟁에 참가한 한인의 수는 중국동북지역에 거주한 100만 조선인 중 64,942명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은 한인은 3,550명이나 되었다. 이런 희생의 댓가로 이주민족이었지만 토지개혁, 정권건설, 해방전쟁 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공민의 자격을 당당히 얻을 수 있었고, 신중국을 건설하는 핵심민족으로 인정받았다. 이에 1949년 '연변종합대학'이 설립되었고,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건설되었다. 이때부터 중국 내 조선인을 '조선족'이라 불렀다.
하지만 모택동의 '반우파투쟁(1957)'과 '문화대혁명(1966-1976)'으로 연변지역 조선족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이 실용주의 노선인 등소평 체제를 선택하고 민족의 다양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는 '다원주의 융합정책'을 시행함으로, 비로소 조선족이 자치주 내에서 '한글'과 '한민족 고유전통'을 유지하는 것이 자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