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고향집과 같았던 강원도 홍천에 작은집 울타리에는 늦은 자두열매가 하늘을 타고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시골집 입구에는 열매가 달려있는 엉성한 울타리들로 초가집 안팎을 구분하곤 했다 이처럼 필자가 어릴 적에만 해도 시골에 가면 울타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벽돌 담장에 밀려 아무리 깊은 산골 시골에 가보아도 보기 힘든 것이 시골집 울타리가 된 것 같다.
이처럼 시골집에는 집을 가리우는 담이 있었지만 우리는 이것을 담이라고 부르지 않고 울타리라고 불렀다. 울타리는 수수깡이나 사리나무를 엮어서 세우는데 남쪽에서는 대나무를 쓰기도 했다. 울타리의 높이는 가슴쯤 올라오며 비바람에 넘어지거나 오래되어 썩어도 좀처럼 고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울타리가 뾰족하고 둥근 모양으로 마감된 연련의 나무판자 또는 철조망 심지어 벽돌로 쌓여진 담장으로 변형되고 만 것이다.
최근 우리는 코로나와 같은 어려운 환경들을 만나면서 우리 자신들을 위해 더욱 견고한 울타리를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울타리는 우리의 마음과 삶 심지어 교회와 사회 곳곳에서 세워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지금의 시대가 힘들고 어려운 시대라는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은 서로가 높이 쌓아올린 울타리 때문에 서로를 바라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삭막한 현실속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원래 한국에는 돌담문화와 울타리 문화가 있었다. 원래 돌담 문화는 쇄국정책을 폈던 대원군 때에 절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결국 남이야 뭐라고 하던 내식대로 살아가는 이기주의 문화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울타리 문화는 집안일을 노골적으로 공개하는 서민적 문화속에서 빗장없는 대문처럼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이웃집을 자기 집처럼 들어오기 일수인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구진 일이던 경사이던 내일이 네일이 되었던 이웃사랑의 표본이 바로 울타리 문화였다. 이렇게 돌담문화는 자기중심적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고 울타리 문화는 고락을 함께 나누는 품앗이 개방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과연 이 말씀에 의미가 무엇일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만 잘 유지하면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는 어찌되든 괜찮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자신만을 위해 담장을 높고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위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희생과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관계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교회와 성도를 향해 예수님이 그의 피와 육체를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가득했던 미움과 이기적인 장벽도 허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나의 육적인 자아와 이기주의의 허물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마음의 장벽을 허무어 용서와 화해 그리고 돌봄의 삶을 실천할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