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6일 별세한 故 이어령 박사의 생전 인터뷰 영상이 최초로 공개됐다.
고려대학교 베리타스포럼(Veritas Forum)은 27일 저녁, 서울 고려대 과학도서관 5층 강당에서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전 촬영한 인터뷰 영상을 최초로 공개했다.
약 1시간 가량의 이 영상에서, 고인은 청년들이 그들의 인생과 신앙생활에서 고민하고 있는 질문 하나 하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전했다.
그는 영상의 서두에서 "내코가 석자인데 누굴 가르치고 할 수 있겠나. '설마?' '진짜야?' 이런 회의를 갖고 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지성, 부정, 회의는 영성과 믿음의 반대말이 아니라 그걸 만드는 필요악"이라고도 했다.
◆ 지성과 영성
특히 '지성'의 대명사였던 이어령 박사는 늦은 나이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영성'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생각하는 지성과 영성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을 아래 요약했다.
"지성과 영성을 대립 개념으로 보는 것부터가 원죄다. 지성과 영성은 하나 된 것이다. 이 세상에 지성이 따로, 영성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 다 지성을 갖고 있다.
지성이 저지른 잘못을 겪지 않고는 우리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알량한 지성을 버려야지만 영성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일종의 추락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지성에서) 못 벗어나는 것 같다. (지성과 영성 사이의 ) 문지방에 서 있다. 대담하게 문지방을 넘어서는 최후의 도전을 하고 있다.
여태까지 생명, 지성 다 내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이다. 숨 쉬는 것, 말하는 것이 다 기프트다. 위대한 재산을 내가 받은 것이다. 죽는다는 건 (그것들을) 반납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뭔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아니다. 그들이 비과학이라고 이야기 하는 목사님들 이야기가 오히려 나는 과학적으로 들릴 때가 참 많다. 과학도 신학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지구와 우주를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 예수님께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것
이날 청년들의 질문 중에는 "이어령 박사님께서 예수님을 만난다면,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도 있었다. 아래 이 박사의 답을 요약해 정리했다.
"부모님을 만난 것처럼 엉엉 울 것 같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때문에 얼마나 속썩으셨어요...' 이렇게 호소하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너무 죄송하고..., 탕자처럼 가슴을 아프게 해 드렸는데, 그런 저를 받아주신 주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나.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 인간의 불완전함과 신앙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완전한 신의 뜻과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어령 박사의 답은 이랬다.
"오히려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완전하다면 뭐하러 신앙을 가지려 하겠나. 완전한 인간은 신의 뜻과 진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게 벽이 있고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걸 느낄 때 인간은 비로소 겸손해 진다."
◆ 평범함이란?
우리는 흔히 이 세상에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특별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범함'에 대한 이어령 박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없다. 벽돌은 평범할 수 있다. 왜? 다 찍어내니까 하나 하나 다 똑같이 평범한 거다. 그러나 평범한 돌멩이는 없다. 모든 돌멩이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누군가 죽게 된다면, 이 지구상에는 빈 자리가 생긴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벽돌은 하나가 부서져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은 그게 안 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비록 길을 잃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한 마리의 양이다."
◆ 죽음에 대하여
끝으로 그가 대답한 것은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은 과연 죽음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을까?
"죽음이 가장 부각된 것이 기독교다. 다른 종교는 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라고 하는데, 기독교만 죽음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그런데 사실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늘이 없다는 건 빛이 없다는 것이다. 그늘을 통해 빛을 보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그늘을 통해 삶이라는 강력한 생명을 아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건 죽음보다 더 강한 신념이 있다는 것이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믿음이다. 나는 그것을 딸을 통해 체험했다."
이어령 박사의 딸인 故 이민아 목사는 생전 암에 걸렸었지만 항암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기독교 신앙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 박사에 의하면 그것은 "죽음 너머의 것"을 믿는 삶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 박사 또한 항암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쓰면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한편, 고려대 베리타스포럼은 이날 공개된 고인의 생전 인터뷰 영상에 대해 "고인의 유언에 따라 행사 당일에만 유일하게 공개되며, 향후 어떤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