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헬무트 틸리케 교수(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의 저서 <신과 악마 사이>(출판사: 복있는사람)가 번역 되어 최근 출간됐다.

틸리케 교수는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나치당이 들어선 제3 제국 시절 나치의 실체를 직시하고 이를 '강렬한 악'으로 표현했다. 이 책은 나치라는 가공할 만한 악의 현실에 직면하여 인간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파해쳤던 그의 대표작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그리스도와 악마가 대결하는 이 이야기는 사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광야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안에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 우리의 운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싸우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마음의 거울'(마르틴 루터)일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거울(빌 2:7)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욕망은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이다. 그 갈망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보다 더 크다. 그렇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 속에도, 경건한 신앙생활 속에도, 조심스레 입에 올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하여튼 이 모든 것 속에 하나님에 대한 냉정한 거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깃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어 "이 세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원수 사이에 있다. 그런데 언제라도 원수 편으로 뛰어들 태세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비밀이다. 이것이 시험의 시간이다. 이것이 땅의 시간이요 이 세대의 시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으로 인해 죽으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십자가는 영원과 시간 사이의 경계선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세상은 그 '십자 교차로에서' 맞닥뜨린다. 이것이 진리다. 다른 신들의 형상과 화상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류의 타락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신비로운 유혹의 힘을 지닌 사과가 아니다. 인간 외에 누가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낙원에서 인간이 타락하는 순간에 진짜 문제는 사과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스스로 신처럼 되려는 인간의 탐욕이 문제였다. 하나님의 순전한 모상이자 하나님과 같은 '형상'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과도한 욕심이 재앙을 가져왔다"라고 했다.

저자는 이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예수의 첫 번째 시험에서 배우게 된다. 시험은 생각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현실에서 생각이 나온다. 하나의 현실, 곧 배고픔의 현실에서 우리를 언제든 시험에 들게 만드는 생각이 나오는 것이다. 배고픔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현실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가, 아니면 그 관계가 깨졌는가?'를 판가름하는 현실이다"라고 했다.

그는 "예수께서 악마에게 맞서 내세운 말씀이 더 큰 권위를 가지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이유는, 그 말씀이 예수 자신에게도 권위 자체이고 예수 자신도 그 권위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자'(엡 3:1)로서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려 있을 때만, 그만큼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말씀을 제멋대로 '이용'하면서 어떤 영리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면(마 7:21 이하),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악마의 말이 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러나 우리와 함께, 우리의 형제이자 동료로서 악의 세력에게 공격을 당하신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토록 무방비 상태로 보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내는 신비다"라며 "그분이 왜 십자가에서 그렇게 저항도 없이, 원망도 없이 원수들에게 자기를 내어 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는지를 드러내는 신비다. 이것이 그분이 광야에서 모든 권세와 왕국들을 거부하실 수 있었던 신비다. 그분의 무방비함은 그분이 받은 사명의 가장 심오한 본질이다"라고 했다.

끝으로 그는 "주님이시면서 형제, 왕이시면서 동행자, 다스리시면서 함께 고통당하시는 분. 이것이 구원자 예수의 드높은 기적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 위에 드리워진 하늘 아래서 살아가듯이, 우리는 바로 그 기적 아래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 기적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예수,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형제! 그 기적이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한다"라고 했다.

한편, 헬무트 틸리케 교수는 1908년 독일 부퍼탈에서 태어났으며 독일 루터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펄전 이후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꼽히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스런 독일에서 나치가 세력을 강화하던 시기에 에어랑엔 대학을 다니면서 개신교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박사와 신학박사 학위 및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반(反)나치 고백교회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에어랑엔 대학의 교수임용이 거부되며, 그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직을 얻었지만 1940년에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라벤스부르크에서 목사로 사역하다가 1942년부터 슈투트가르트 시의 신학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매주 수천 명의 회중에서 수많은 설교 및 강연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교회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연합군 지휘부 회의에 참석해 독일 대학의 신학 교육이 정상화되는 데 기여했다. 이후 튀빙겐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임명되며 동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은퇴 후에는 자신의 설교 사역의 경험을 젊은 목회자들에게 나누는 일에 매진하다가 1986년 함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스펄전의 설교학교>, <세계를 부둥켜안은 기도>, <친애하는 신학생 여러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