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미션대학 박사원장 이병구 박사
(Photo : 기독일보) 그레이스 미션대학 박사원장 이병구 박사

기독교 역사를 선교적 관점으로 기독교 역사 전반을 조명하고 서술한 역사학자 케네스 스콧 라투렛(Kenneth Scott Latourette, !884-1968)은 "18세기 이후를 위대한 선교 시대(The Great Century of Mission "라고 평가하였다. 이유는 18세기 동안 이룬 선교 역사보다 18세기 이후 이루어진 선교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암케리(William Carrey, 1761-1834)를 중심으로 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 대상자들을 자발적으로 찾아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적극적인 선교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해안 선교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위대한 선교 시대는 우연히 도래 한 것이 아니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현대 선교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오늘은 경건주의 운동을 선교 운동으로 발전 시킨 프랑케를 살펴보자 한다.

프랑케는 독일 경건주의의 대표적인 스페너(Philip Jacob Spencer, 1635-1705)가 1694년 할레(Halle)에새운 할레대학교를 계승하면서 경건주의 운동이 교육에 머무르지 않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현대 선교 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프랑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프랑케는 1687년 뤠네부르그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 설교를 작성하던 중에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회심은 프랑케에 의해 형성된 할레 경건주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프랑케는 1691년 할레 근교에 있는 글러우하(Glaucha)의 성 게오르겐(st. Georgen) 교회의 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1691년 베를린에서 친구이자 스승인 스페너를 만나 경건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고 1698년 할레대학교 교수로 임명을 받게 되면서 할레대학교를  근대 선교 운동의 전초기지로 만들게 된다.

경건주의자들은 첫째 진정한 회개와 삶의 변화, 둘째 성경공부와 기도, 친교, 영적 성장, 셋째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프랑케는 이러한 스페너의 경건주의 운동에 크게 감동을 받는다.

프랑케는 교회의 영역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프랑케는 정통주의의 토양 아래서 자랐으며 하문과 경건을 겸비한 인물이다. 특히 회심을 통하여 사변적인 신앙에서 체험적인 신앙으로 변하게 되었고, 그것이 토양이 되어 교육사업과 선교 사업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사역하였던 글러우하 도시는 독한 포도주를 생산하는 주류산업이 발달 되었다. 따라서 알콜 중독이 심각한 문제 이었다. 한 집 건너 술집이었다. 1691년 페스트로 인구 절반이 죽었다. 화재로 할레 도시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다. 독일의 30년 종교 전쟁으로 800만명의 사망자가 생겼고 폐허가 된 상황 속에서 교회 역할과 새로운 활력과 개혁을 이끌었다.

필자는 프랑케를 선교 운동의 핵심 인물로 보는 이유는 그는 삶의 현장을 떠나서 수도원으로 가지 않고 사회변혁을 위하여 교회의 역할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침체되고 전통만 남아 있는 루터교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교회의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변화에 앞장 섰다는 것이다. 프랑케는 "개인의 철저한 회심을 통한 사회 변혁" 이었다. 프랑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전인적인 구원이었다. 이것이 사회와 경제, 선교까지 이어졌다.

프랑케의 선교적 업적은 이방 선교사를 위한 선교 훈련 필요성을 느끼고 할레대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고아원을 세우고, 자선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크게 기여한다. 또한 인쇄소, 약국, 신문사등을 설립하여 이윤을 내고 자발적인 기부를 통하여 사역을 유지하였다. 모라비안의 창시자 진센도르프가 프랑케의 영향을 받아 자비량 선교와 비즈니스 선교를 시작한 것은 우연히 아니다. 그의 스승인 프랑케의 영향이다. 진센도르프는 할레대학교에서 프랑케에게 배웠다.

프랑케의 가장 큰 선교적 업적은 할레선교회를 설립하여 1705년 인도 덴마크 령인 트란케바 로 인도 최초 선교사인 치겐발크(Bartholomäus Ziegenbalg, 1683-1719)와 플뤼챠우(Heinrich Plütschau, 1677-1746)를 선교사로 파송한 일이다. 덴마크 국왕인 프리드리히 4세는 덴마크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위한 선교를 하게 원하였다. 프랑케의 추천으로 최초 개신교 인도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이 두 선교사를 시작으로 60여명의 할레대학교 출신 선교사들이 인도에서 사역하였다. 프랑케와 할레선교회는 인도 선교와 뗄 수 없는 선교의 베필이 되었다. 윌리암케리는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지만 영국의 반대로 켈커타에서 선교를 못하고 선교에 호의적이었던 덴마크 령인 인도 캘커타 윗쪽인 세람포로에서 정착하고 선교하였다. 이것이 프랑케가 미친 실제적인 현대 선교의 기초를 놓은 사실이다. 프랑케는 인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유럽, 유대인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필자는 프랑케는 경건주의의 신조나 신학으로 매여 있지 않고 세상에서 실천적이고 행동적인 경건을 영혼 구원하는 선교에 관심을 갖고 실천적으로 그 시대에 선교사를 훈련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육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현대 선교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그는 선교 핵심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