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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에 밟는 순간, 심층종교 깨닫고 선택하는 에피파니
그들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 배반하지는 않았다
그분이 침묵?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 그분과 함께 있어

김응교 | 새물결플러스 | 390쪽 | 20,000원

"영화는 우리를 세상 속으로 안내한다. 영화를 보며, 나를 반성하고, 역사를 체험하고, 상처를 치료받는다. 비극을 보며 낮아져 겸손을 배운다. 절망 속에서 희미한 희망을 꿈꾼다. 영화에는 깨달음의 순간, 곧 에피파니의 순간이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이며 '윤동주' 관련 서적 3권을 출간한 저자가 지난 20년간 썼던 영화평론을 한데 모았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난잡하게 흩어져 있는 영화평들을 '시네마 에피파니'라는 이름으로 깁고 다듬어 작은 밥상을 차렸다."

제목의 '에피파니'라는 말이 궁금해, 저자의 안내에 따라 올해 쓴 평론 3부 영화 <사일런스> 편부터 찾아봤다. 현현(顯現)이라는 말이 조금 더 친숙한 에피파니(Epiphany)란 '나타난다'는 영단어로, 신적 혹은 초자연적인 것의 출현을 뜻한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날을 기념하는 주현절(主顯節)을 '에피파니의 날', '현현절(顯現節)로 부른다.

사일런스
▲<사일런스>에서 로드리게스 신부(왼쪽)에게 계속 고해성사를 하러 오는 일본인 기치지로. 그는 결국 로드리게스를 배신한다.

'에피파니'는 2018년 발표한 방탄소년단(BTS) 곡 중 하나라는 점도 눈에 띈다. 이 곡이 실린 앨범에는 'DNA', 'FAKE LOVE', 'IDOL' 등이 유명한데, 기승전결 식의 구성으로 'Euphoria', 'Trivia', 'Singularity' 등 비슷한 제목들도 있다. 가사는 '웃고 있는 가면 속의 진짜 내 모습을 다 드러내/ 빛나는 나를 소중한 내 영혼을' 등등.

저자는 일본에서 배교(背敎)한 포르투갈 선교사를 다룬 소설 <침묵>을 영화화한 <사일런스>에서 계시의 순간, '에피파니'를 발견한다. 예수 혹은 성모를 그린 성화 나무판 '후미에'를 밟으면 일본인 신도들이 살 수 있다고 회유하는 일본 관리의 말 속에서 주님의 묘한 음성, '에피파니'를 듣고 아무도 모를 깨달음을 얻는다.

"나를 밟아라(Step on me).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이제 너의 생명은 나와 함께 있다. 밟아라." 그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 자기의 얼굴 그림을 밟고 배교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후미에를 밟는다.

사일런스
▲일본에서 선교사와 가톨릭 신도들이 받던 고문.

저자는 이 순간에 대해 "로드리게스는 형식에 집착하는 표층(表層) 종교보다, 죽어가는 이웃과 하늘의 본질을 신뢰하는 심층(深層) 종교를 택했다"며 "그에게 후미에를 밟는 순간은 심층 종교를 깨닫고 선택하는 에피파니의 순간"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로드리게스는 가룟 유다의 마음으로 일생을 괴롭게 일본에서 살아갔다. '내 마음을 재판하는 것은 일본인도 사제단도 아니고, 오직 주님뿐'이라는 믿음으로 일본인의 옷을 입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 85세까지 살다 슬픈 이력을 마감한다"며 "로드리게스는 이 늪지대에서 더욱 지루한 나날의 고문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운 없는 순교자'가 아닐까"라고 전했다.

로드리게스의 마지막 고백이다.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소설 <침묵>, 294-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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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일런스>에서 신도들이 고문당하는 모습.

이 책은 총 30편의 글을 가장 최근부터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연도 순으로 배치했다. 가장 첫 글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씨의 출연작 <화녀>, <죽여주는 여자>, <미나리> 등 3편을 '죽여주는 캐릭터, 윤여정'이다. 이 외에도 <기생충>, <신문기자>, <보헤미안 랩소디>, <싸이코>, <암살>, <연인>, <명성황후>, <레미제라블>, <마리 앙투아네트>, <미션>, <프란체스코>, <공자>, <다윗 대왕>까지 이어진다. 글을 읽고 미처 감상하지 못한 영화들을 보는 것도 좋겠다.

"어떤 영화를 보는 수용자는 상상력이 융기되고, 치명적인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것이 치료가 되든(자기 성찰), 계시가 되든(종교적 만남), 다짐의 순간이 되든(역사적 성찰),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손에 쥔 듯한 깨달음의 순간을 얻습니다. 영화는 에피파니의 순간을 통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여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깨닫게 하는 귀중한 예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