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Photo : 기독일보) 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8-13에서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해 몇 가지 권면한다. 그는 특별히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나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대해서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면서 이를 잊지 말 것을 강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로서 이 말씀을 심령에 깊이 간직하는 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잊어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처사를 잊지 말라

베드로는 본문 8절에서 이와 같이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렇다면 이 말씀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을 수도 있고 천년이라는 시간이 하루같이 짧을 수도 있기에 이를 염두에 두고 그분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분이 마지막으로 인류를 심판하실 때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때는 모든 사람들이 두 가지 중에 하나가 된다. 하나는 죄를 회개하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는 경우로서 이들은 하루가 천 년 같은 고통과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생명의 부활을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천년을 하루같이 지낼 수 있도록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시편기자는 시 90:4에서 그분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천년이라는 세월이 아주 길게 느껴지지만 그분의 시간으로 보면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생들은 그분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틀 안에 주님을 가두어 두면서 무슨 일이 생각보다 조금만 늦어지거나 빨라져도 주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인생을 향한 그분의 시간표가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꿔 보려고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는 말이다.

주님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분의 시간표에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분은 어떤 컴퓨터나 기계보다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안내해 주신다는 말이다. 우리 인생이 잘나고 똑똑한 것 같아도 그분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도 그분에게 있어서는 단지 그만 그만인 뿐이다. 주님에게는 오직 사랑의 대상만 있을 뿐인데 잘나거나 못난 자식 할 것 없이 모두가 사랑하는 자식이라는 말이다. 그분에게는 은혜를 저버리고 살아가는 탕자나 말썽만 피우는 사고뭉치 아들도 더없이 귀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구원의 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천년도 하루 같은 기다림이 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하루라도 빨리 오셔서 천국으로 데려갔으면 하는 사모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함으로 아버지를 떠나서 방황하는 아들을 기다리는 그분의 심정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집 나간 자식이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가운데 날이 저물도록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의로운 하나님이 마냥 기다려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분이 사랑하는 자녀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지는 않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서 죽음까지 허락 하셨지만 구원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자녀라도 그분의 품을 떠나 있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은 집 나간 자식을 위해서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지만 때가 되면 심판할 사람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처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의 공의는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을 받고 심판받아야 할 사람은 철저히 심판받는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아주심을 잊지 말라

본문 9절 하반절에는 그분이 인생들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전도를 하다보면 고래심줄같이 질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쩌면 그렇게 완고할 수 있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가끔씩 이들이 지옥의 아랫목에 가더라도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까지도 오래 참으시는데 그 이유는 단 한 사람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이러한 심정은 우리가 잘 아는 요 3:16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은 이처럼 우리가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참으시는데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참고 또 참으신다는 말이다.

베드로 당시 이러한 사실에 대해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님이 오랫동안 참으신다는 사실을 오해함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려 했다. 그분이 오시려면 아직 멀었으니 실컷 즐기면서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기도 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노아의 홍수 때를 살았던 사람들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노아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서 전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정신 나간 노인이 잠꼬대를 한다 하면서 노아를 배척하고 조롱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확한 시간에 세상은 홍수로 뒤덮였고 노아를 조롱하던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홍수에 휩쓸려 죽어갔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적당히 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그분의 말씀에 따라서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 아무도 멸망당하지 않기를 위해서 오래 오래 참으신다. 이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그분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의 재림이 늦어지는 궁극적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늦어지는 이유는 약속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오래 참으시는 그분의 은혜라는 말이다. 이는 그 누구도 멸망당하지 않도록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은혜로서 그분은 누구든지 유황불이 활활 타는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심정을 간직하는 가운데 죄로 죽어야 했던 우리를 살려주신 그분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인내로 기다리신다. 이에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가슴에 새김으로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다리시는 그분의 심정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많이 남은 것 같아도 하나님의 시간표로 보면 아주 잠깐이며 그분이 후하고 콧바람을 일으키는 순간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천국에의 문을 닫아버리기 전에 지체하지 말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 중에 잠시 후에는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전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님의 재림이 도적같이 임하는 것을 잊지 말라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이 구원의 날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의 날이다. 지금 당장 물질적으로 넉넉하다고 자만해서는 안 되는데 항시 은혜의 문이 닫히고 심판의 문이 열릴 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주님이 어김없이 찾아오신다. 그분의 심판은 이미 수많은 곳에 말씀으로 증거 되어 있으며 이러한 말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집행될 것이다. 이러한 심판은 세상에서의 신분이나 지위나 그 어떤 것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임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번 예정된 심판은 어떠한 이유로도 번복하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도적같이 임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은 예고 없이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 찾아오신다는 말이다. 도둑은 도둑질을 하면서 몇 날 몇 시에 찾아가겠노라고 알려오는 법이 없는데 언제든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기회를 엿보아서 찾아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찾아온다면 그 시간에 맞추어서 경계를 할 수 있겠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기에 쉽게 붙잡을 수 없다. 주님의 재림도 이와 같이 때를 알 수 없기에 언제든지 그분의 재림에 대비해서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요한계시록 16:15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주님이 도적같이 오실 것이기에 언제 어디서 그분의 재림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열 처녀 비유'가 나타나 있다. 열 명의 처녀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는데 그 가운데 다섯 명은 슬기롭게 행한 반면 다른 다섯은 미련하게 임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가졌지만 기름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 그 결과 미련한 사람들은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신랑을 만날 수 없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결혼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에 주님은 이와 같이 교훈하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는 깨어서 주님 오실 그 날을 잘 준비하라는 말로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 오시는 그날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믿음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제 아무리 그럴듯한 인생도 헛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일이 무엇일까?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메일 인터넷 판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를 소개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이 책은 호주의 한 요양원에서 말기 환자들을 돌보던 간병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모아서 펴낸 것이다. 그녀가 관찰했던 시한부 환자들 가운데 가장 후회하는 일은 바로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바라는 삶을 이루었다고 해서 진정 후회 없는 인생을 이룰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이루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더 이상 후회하기 전에 나는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이루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인생의 종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같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말하는 불치의 병은 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든지 이 땅을 떠날 수 있기에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살 수 있어야 하다.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을 심판 받을 때가 이를 것이기에 살아온 시간을 결산하며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인생에 후회하지 않을 가장 확실한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하는 일이다. 구원의 문이 닫혀서 기회를 잃어버리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예수를 전하는 것이야말로 이 땅을 떠날 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일이라는 말이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라도 도적같이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 깨어서 그날을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