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어떤 대형교회의 목사가 설교시간에 ‘이념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그냥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의 이념은 정치적인 이념, 즉 자유민주주의의 우파와 사회주의의 좌파의 이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 말대로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참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사실 그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가 않습니다. 마치 물과 불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이 꺼지던가, 아니면 물이 증발해야지 불과 물이 공존할 수 없듯이, 좌우의 이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사회주의)의 이념을 가진자가 전향을 해서 자유 민주주의 적인 사람이 되던가, 아니면 자유 민주주의적인 사람이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자로 변질될 때 하나가 되지, 그냥 두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의 우파가 사회주의의 좌파와 하나가 될 수없는 것은 하나님의 영과 사단의 영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이념을 가진 좌파와, 자유 민주주의의 우파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이념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와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님도 말한적이 있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는 사회주의 영을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도 교회를 다닙니다. 그리고 자기네들도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신앙과 참 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앙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잘못된 복음을 믿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잘못된 복음을 전하거나 믿으면 우리는 그것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사도바울도 다른 복음을 좇는 자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갈 1:6),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좌파 기독교인들이 믿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믿는 복음은 바로 소셜가스펠 (Social Gospel)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그들의 신학적인 색깔은 진보주의 신학 또는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입니다. 이 사회주의자(socialist)들이 믿는 사회주의 복음(social gospel)은 어디서 온것일까요? 그리고 소위 말하는 진보적 신학 또는 자유주의 신학은 무엇입니까?
Social gospel 이라고 하는 사회주의 복음은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 해방신학은 1950년과 1960년 대 사이에 라틴 아메리카의 카톨릭에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해방신학이라고 불리워진것은 1970년대 초 페루의 신학자 구스타보(Gustavo)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이 해방신학은 신학과 마르크스의 이론이 결합된 것으로 순수한 복음에서 떠나서 가난과 억압에서의 해방과 사회적 혁명을 부르짖는 변질된 잘못된 이단신학입니다. 한국의 어떤 대형교회에 다니는 좌파 정치인이 예수님을 혁명가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또는 그가 다니는 교회가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혼 구원자로 오신 분이지 사회개혁과 혁명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이 해방신학이 미국에 영향을 주어서 ‘흑인신학’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해방신학이 대한민국에 영향을 주어서 ‘민중신학’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 같은 사상을 가진 것으로 모두 변질된 이단 신학입니다. 흑인 신학은 흑인 메시아를 주장하며 흑인사회에 들어가서 흑인들의 저항과 혁명을 위한 도구로 사용이 되어졌고, 민중신학은 70, 80년대 숨어서 활동하던 운동권이나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민중들에게 들어가서 사회주의로의 혁명을 이끄는 도구가 되어진것입니다. 한국에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많은 좌파 목사들이 생긴 것은 바로 이런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과 같은 이단 신학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좌파 정치인들이 지금 차별 금지법을 만들어서 동성애를 합법화 하려고 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정치인들 중에는 교회를 다니는 자들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많은 좌파 기독교인들이나 목사들이 또한 동성애를 옹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해방신학의 영향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한 목사나 그런 진보적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동성애를 죄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한 자들이 개혁주의 적인 보수 신학교에 들어가서 교수로 활동을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신뢰했던 일부 보수 신학교들도 옛날 같이 순수하지 못하게 변질이 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18세기 경에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믿음의 눈으로 보거나 교리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고, 경험이나 사람의 이성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성경을 인간적인 지식과 과학과 경혐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은 다분히 인본주의적인 신학입니다. 반면에 개혁주의 적인 보수 신학은 신본주의적인 신학입니다. 예를 들자면 저와 같이 개혁주의 보수 신학을 공부한 목사는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으로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는 그것은 그냥 꾸며낸 이야기로만 간주합니다. 아니면 그냥 상징적인 것이라고 왜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으로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으니 동성애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회주의 적인 이념을 가진 자들은 사회주의 복음을 추구하는 해방신학(민중신학)이나 인본주의 적인 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신학자체가 변질된 인간적이고 이단적인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자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건전한 신학, 개혁주의 보수적인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신학이 상반되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신학에 바탕을 둔 우파와 좌파는 하나가 될 수 없고 같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반면에 북한은 사회주의 공산국가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에 근거를 둡니다. 철저하게 법에 의해서 선악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공산국가는 법위에 민중이 있습니다. 그리고 민중 위에 공산당이 있고 그 위에 독재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자신이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중 민주주의’입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법의 잣대로 그 사람이 죄가 있고 없고를 판단합니다. 100명중에 99명이 어떤 사람이 죄가 있다고 주장해도, 법적으로 죄가 없으면 그 사람은 무죄입니다. 그러나 민중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민중이 법입니다. 여론을 조성해서 저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면 아무리 드러난 죄가 없어도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한민국도 언론과 방송을 통해서 여론을 조성해서 정치를 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미국도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민주당이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여론 몰이에 좌파 목사들이 함께 동조하고 협조하고 있습니다. 반성경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으로 우리의 죄가 있고 없음을 판단하지 누가 죄가 있다고 선동해서 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악한 인간들이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선동해서 죄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동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것은 지극히 악하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보더라도 자유 민주주의는 성경적이지만, 법을 무시하고 여론을 조성하고 선동하는 사회주의는 반 성경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사회주의 국가는 자유 보다는 평등을 주장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는 없어도 평등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야 되니 자연히 국가가 통제하는 통제경제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모든 부를 균등히 평등하게 분배하겠다는 것이 사회주의입니다.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적게 하는 사람도 모두 똑 같이 받게되니, 자연히 일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니 국가 경쟁력이 떨어져서 경제파탄이 오게되고 그 결과 모든 인민들이 다 똑 같이 가난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베네수엘라가 그렇고 북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시장경제입니다. 내가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놀고 싶으면 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한 만큼 대가를 받게 됩니다. 많이 일한사람은 많이 받고 적게 일한 사람은 적게 받습니다. 어느 것이 성경적이고 어느 것이 반 성경적인가요? 성경에서는 분명히 심는 만큼 거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확의 법칙(고후 9:6)이라고합니다.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마 25:14-29)를 통해서 알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일한 자를 더 많이 축복해주시고, 일하지 않은 자에게는 있는 것 마저 빼앗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무상복지 무상배급 무상등록금과 같은 것들은 게으른 자들이 주장하는 지극히 반 기독교 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적인 가치관에서 세워진 자유 민주주의와, 반 기독교적이고 유물론을 추구하는 마르크스 사회주의가 예수 안에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이념적인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사 그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 자들은 민중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변질된 이단 신학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무오설을 믿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무오설을 부인하고, 성경을 잘못 왜곡하는 변질된 사회 복음주의자들과 결코 함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은 다르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자는 말은 결코 비 논리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믿는 신학과 우리가 믿는 신학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우리 참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후 6: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