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공식에 따라 쓴다
'아트설교연구원'에서는 1년에 한 번, 교인들이 관심을 갖고 듣는 설교자의 설교를 분석한다. 2019년에는 미국 리디머교회 팀 켈러 목사의 설교를 분석한다.
다른 설교자도 마찬가지였지만, 팀 켈러의 설교 분석을 통해 배운 것은 글쓰기 공식대로 글을 써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설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설교 글도 내가 싶은 대로 쓰지 않는다. 글을 쓰는 공식대로 써야 한다.
수학 문제를 풀려면 먼저 수학 공식을 알아야 한다. 그 공식대로 풀 때 어려운 수학 문제가 풀린다. 삼각함수, 미분, 적분은 공식에 대입해야 풀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설교도 글의 공식에 따라 써야 한다. 설교자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안 된다. 글의 공식에 따라 글을 써야 한다. 만약 그렇게 쓰지 않으면 교인이 들을 수 없는 설교가 된다. 아니 듣기 싫은 설교가 될 수 있다.
설교자들은 하나님 말씀만 말하면 설교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성도'들을 '가나안 성도'로 만든다는 생각하지 못한다. 하나님 말씀을 글의 공식에 맞게 써서 설교해야 한다.
글의 공식이 있다. 글의 일반적인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으로 쓴다. 그 다음 이 공식에 따라 원칙대로 써야 한다.
글을 쓰는 원칙은 세 가지다.
첫째,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둘째, 자기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셋째, 자기 주장에 대한 사례를 든다.
설교 글은 이 같이 써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설교자들이 대부분 설명 위주의 설교 글을 쓴다. 성경 본문 단어 혹은 구절의 해석 중심으로 쓴다. 그럼 글의 공식이 아니므로 교인이 듣기가 힘들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명만으로 설교를 한다. 서론만으로 설교를 하면 듣는 교인은 그 설교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음을 물론 쉽게 지루해진다.
세상의 글쟁이들은 글을 공식에 따라 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글쟁이인 설교자도 설교를 글의 공식에 따라 써야 한다.
설교도 글의 공식에 따라 써라
그럼 설교 글의 공식은 무엇인가? 설교 글의 공식은 아래와 같다.
첫째, 설명이다.
둘째, 논증이다.
셋째, 적용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팀 켈러 목사도 설교 글의 공식대로 설교를 한다. 즉 설명, 논증, 적용의 공식에 따라 글이 쓰여졌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도 설명, 논증, 적용의 공식에 따라 글이 쓰여 있다.
대다수 설교자들은 글쓰기 공식에 따른 설교 글 대신, 글쓰기 공식을 무시하고 글을 쓴다. 공식에 따라 글을 쓰지 않으니, 교인이 그 설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설교가 끝나면 으레 하는 인사로 '목사님, 설교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예배당 문을 나가면서 말을 건넬 뿐이다.
설교자가 설교 글을 쓸 때, 설명과 적용은 무의식적으로 해 왔다. 가장 약한 것이 논증이다. 금번 논증 세미나를 하면서 팀 켈러가 하는 논증을 보니, 다른 설교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논증을 10개 가까이 한다.
논증을 많이 하는데, 길게 하지 않고 가능하면 짧게 한다. 이는 시대를 반영한 논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많은 설교자들이 한두 개만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럼 논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철학자 탁석산은 논증을 하되 '좋은 논증'을 하라고 한다. 그가 제시하는 '좋은 논증'의 조건 은 네 가지다.
첫째, 전제와 결론이 관련 있어야 한다(관련성).
둘째, 전제는 참이어야 한다.
셋째, 전제는 결론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해야 한다: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라.
넷째, 반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자는 논증을 할 때 원칙을 세운 것이 있다. "논증을 충분하게 하라".
논증을 충분하게 하려면 논증의 수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 한두 개가 아니라, 다섯 개 전후여야 한다.
이와 같이 설교 글을 공식에 따라 써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설교를 공식에 따라 글을 쓰면 교인에게 잘 들려지기 때문이다.
글을 공식에 맞게 쓰는 이유는 잘 읽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글이 잘 읽혀지려면 다음 3가지 ABC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A(Affordable): 한 눈에 읽히는 매력적인 글이다.
둘째, B(Brief): 간단하고 간결한 문체의 글이다.
셋째, C(Clear): 메시지가 명료하고 분명한 글이다(김병완의 <책 쓰기 혁명>에서).
글이 잘 읽혀지는 글은 한 마디로 '우아하게', '간결하게', '분명하게' 쓰는 글이다.
문장의 3원칙이 있다. 이 3원칙은 잘 읽혀지는 글의 조건과 비슷하다.
첫째, 짧게 쓰라.
둘째, 정확하게 쓰라.
셋째, 분명하게 쓰라.
글은 무엇보다 잘 읽혀야 한다. 설교는 잘 들려져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글의 공식을 익혀 그 공식에 맞게 글을 써야 한다.
글의 중요성을 안 미국 등 서구는 글쓰기를 맨 위에 둔다
글쓰기를 말할 때마다 언급되는 대학교가 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다. 하버드대학교가 글쓰기를 통해 세계적인 리더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티칭 펠로우(teaching fellowing)로 1년간 학부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를 가졌던 이용규 목사가 학교 측으로부터 들은 첫 마디가 이렇다.
"미국 대학의 목표는 설득력 있는 사람을 만드는데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글쓰기다."
하버드대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이나 서구의 대학교육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글쓰기다. 대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배우고 공부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창의적이면서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었느냐다.
글쓰기나 토론 능력이 있는 학생이 높은 학점을 받게 된다. 결국 얼마나 글이 깊이 있게 분석적으로 읽으면서 많이 읽느냐가 학부 교육의 성패를 좌우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투자가인 워렌 버핏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영대학은 사례만 가르칠게 아니라 말과 글로 의사소통 하는 방법도 가르쳐야 한다."
필자는 책을 읽다 눈에 확 뜨는 한 토막 글을 읽었다. 바로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안젤리나 졸리가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보여줄 게 없다"며 영화계를 떠나 있던 적이 있다. 이 시간 동안 그녀는 뉴욕대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왜 하버드대학교를 비롯한 미국의 대학교와 유명한 영화배우가 잠깐 쉴 때 글쓰기에 집착하는가? 글이 자신을 표현함은 물론, 세계적인 리더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교육부에서 '미국 성인의 언어적 숙련도가 평생에 걸친 경제적 성공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그 결과 글쓰기 능력을 5분위로 나눴을 때, 최고와 최저간 소득의 차이가 3배 이상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이나 서구는 글쓰기를 강조한다. 글쓰기를 통해 세계적인 리더를 만들어 나간다. 목회자들은 입만 열면 세상을 변혁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무엇으로 변혁시킬 수 있나? 세상을 변혁시키려면 조건이 있다. 세상보다 뛰어나거나 앞서가야 한다. 글쓰기를 하지 못하는데 세상보다 뛰어날 수 없다. 만약 글쓰기를 못하는데 뛰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며 이는 삼척동자도 웃을 말이다.
▲김도인 목사. |
설교자는 최고의 글쓰기를 배우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이외수 문학관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쓰는 이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
아주 멋진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책에서 읽고, 특별하게 메모해 두었다. 이유는 설교자에게 딱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교인이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핼 책임이 있다. 설교를 듣는 교인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축구 선수에게는 나이가 아니라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 형이라고 한다. 한국 U-20 축구대표팀 막내인 이강인(18·발렌시아)는 2019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최우수 선수인 '골든볼'을 거머쥐었다. 사람들은 이강인 선수를 '막내형'이라고 칭한다.
축구만 그렇지 않다. 목회자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목회자 사이에서는 교인이 많은 목회자가 형과 같은 존재가 된다. 나이, 신학교 선후배 관계는 무시되고, 오직 교회 사이즈에 따라 형과 동생이 된다.
나아가 지금은 SNS의 시대다. 이 소셜 왕국에서 리더는 정보를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결국 글이 이 시대를 이끄는 리더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글쓰기에 남달라야 한다. 글쓰기가 남다르려면, 글쓰기를 배워야 한다. 설교자들을 10년간 가르쳐 본 바에 의하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설교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축구를 잘 하는 사람이 형과 같은 존재가 되듯, 글을 잘 쓰는 사람이 형과 같은 존재가 된다.
설교자는 글쓰기를 배워야 한다. 나는 최근에 책 쓰기 배우는 곳을 두 군데 다녀왔다. 다녀오지 않을 때와 비교해, 다녀온 뒤 책 쓰는 것에 대해 훨씬 많이 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글쓰기를 배워야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바둑을 두었다. 나의 바둑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바둑을 많이 두어도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유는 딱 하나다.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이 바둑을 둔 친구는 지금 엄청 잘 둔다. 이유는 그 친구는 체계적으로 배웠다. 이젠 내가 그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장인이 바둑을 나보다 잘 두셨다. 하지만 기간은 짧았다. 짧은 기간임에도 나보다 잘 두시는 비결은, 바둑을 체계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나는 몇십 년째 실력이 똑같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글쓰기를 배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책 쓰기를 하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설교자는 글쓰기에 그리 관심이 없다.
설교자는 설교 글로 사명을 감당하는 자다. 그렇다면 설교 글쓰기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설교 글을 배울 곳이 거의 없다. 감히 말하지만, '아트설교연구원'밖에 없지 않나 싶다.
필자는 글을 쓸 줄 안다. 나아가 글을 봐줄 줄 안다. 글을 봐주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 글을 쓴다고 봐줄 수 있지 못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글을 쓰고 가르치다 보니, 글을 지도해 줄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 시대 한국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라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10년간 5,000권의 독서와 10년 매일 글쓰기를 시키셨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