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교수(안동대 미술학과)는 여름방학을 맞아 본국에서 개최되고 있는 해외 유명 작품들의 전시회를 본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되는 전시회는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전>이다. 이 전시는 지난 6월 26일부터 시작돼 오는 9월 30일까지 계속된다.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을 찾은 것은 지난 1992년 국제미술평론가협회가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차 비엔나를 방문하면서다. 며칠간 이어진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비엔나에 머물던 중 머리도 식힐 겸 지척에 있는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을 찾았다.

비엔나 링슈트라세에 있는 미술사 박물관은 웅대한 자연사 박물관과 함께 쌍둥이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파리 루브르 박물관 미술관과 더불어 유럽의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이 곳은 15세기부터 약 5백 년간 수집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때의 기분은 마치 ‘도랑치다 가재 잡은 격’으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번에 덕수궁 미술관에 가져온 작품들은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회화관에 소장된 5천여 점의 그림 중 엄선된 64점이다. 렘브란트를 비롯해 루벤스, 반다이크,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틴토레토, 크라나흐 등 높은 질의 콜렉션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작품 수로는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옥석을 가리듯 좋은 것을 골라왔다는 기획자의 설명을 들었다.

상업적인 목적이 크게 작용하는 일반 흥행용 행사와 달리 이번 전시는 북유럽과 르네상스 베네치아 미술의 대표작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렘브란트의 작품을 단 한 점 가져오고서 ‘렘브란트와 바로크 화가들’로 홍보한 것은 옥의 티로 지적할 수 있겠다.

그중 필자가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베르나르도 스트로치(Bernardo Strozzi)의 <세례 요한의 설교(1643-44)>다. 세례 요한이 종교지도자인 듯 보이는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증거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참고로 스트로치는 제노바의 수도회에 들어가 교구 성직자가 되고, 그 뒤로는 가난한 집안을 돌보기 위해 항구의 기술자로 일하다가 베네치아 공국으로 이주, 색감이 풍부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베네치아 회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화가다. 당시만 해도 외지인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탈리아 미술계를 자국인이 이끌었던 것은 예외적이다. 스트로치의 예술적 특출함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림에서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막대기를 쥐고 양털을 뒤집어쓰고 손을 펴서 이야기에 집중한다. 긴 머리에 수염,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는 요한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회화적 전통이었다.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그 단서는 왼손에 쥐고 있는 두루마리에 있다. 거기에는 라틴어로 ‘Ecce agnus Dei’, 즉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는 지금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요1:34)’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미술에서는 세례 요한의 설교 장면을 표현할 때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 외에도 ‘Ego vox clamantis deserto’, 즉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요1:23)’라는 구절을 인용하기도 한다.

풍경 앞에 있는 인물들은 관람자에게 가깝게 보이도록 비스듬히 비켜서서 대칭으로 나누어져 있다. 세례 요한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 민족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킨다. 스트로치는 타고난 이야기꾼답게 그들 사이에 모종의 긴장이 흐르고 있음을 전달하고 있다. 한 사람은 손을 허리춤에 대고 못마땅한 포즈를 취하며 눈살을 잔뜩 찌푸린다.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도 비슷하다. 그는 손바닥을 펴서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장황하게 웅변하고 있으며 그의 얼굴 표정으로 미루어 그가 매우 완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진리를 외치는 자와, 이를 애써 외면하고 심지어는 반박하는 자의 대립이 스며들어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마치 연극 배우들처럼 행동하면서 좀처럼 자신의 의사를 굽힐 기색이 없는 듯 보인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중심축에서 밀려나 있다. 화면 하단에 있는 어린이와 뒤쪽의 젊은이가 바로 그들이다. ‘의심’의 논리로 무장한 자들은 세례 요한의 증언을 한사코 반박하고 있으나, 들을 귀 있는 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일체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성행하던 르네상스의 화풍과 달리 그림 배경에 나무와 숲을 넣어 실재적 사실감을 살리고 있으며, 게다가 색감도 화려해 그림의 풍부성을 더해 주고 있다. 내용 면에서도 루벤스의 과장됨, 카라바지오의 드라마적인 요소, 라파엘로의 지나친 미화 없이 평범 속에서도 긴장의 흐름을 잃지 않고 있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다. 종교지도자와 유대인들의 완고함과 의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이야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불굴의 신앙이 그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 가지 가치만을 숨질 때까지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간 위대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며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사40:3)’ 하기 위해 태어난 자의 목소리가 지금도 우리의 가슴팍을 후려치는 것 같지 않은가.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