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의 마누갓은 네팔 출신의 난민 소년이다. 2012년 5월 미국에 온 마누갓이 태어난 곳은 네팔의 UN 난민 캠프. 마누갓의 부모는 원래 부탄에 살았다.
네팔 인접국인 부탄 남부에는 1620년대부터 네팔인들이 이주해와 부탄 국민으로 살았다. 하지만 부탄 정부가 1990년대 중반 네팔계 부탄인들이 치안에 위협이 된다며 내쫓기 시작했고 네팔 정부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아 10만 여명의 네팔계 부탄인들은 오갈데 없는 난민이 되었다.
이들은 네팔 동부 지역에 있는 7개의 UN 난민 캠프에서 17년간을 생활하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부탄으로 돌아가거나 조상의 나라인 네팔에서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부탄과 네팔 정부 모두 이들을 거부하자 UN은 제3국에 정착시키기로 결정했고 네팔계 부탄인들 대다수는 미국에 오기를 원했다.
2013년 4월 기준 66,134명의 네팔계 부탄인들이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들어왔다. 다음으로 캐나다 5,376명, 호주 4,190명, 뉴질랜드 747명 순이다.
마누갓의 부모도 미국 행을 결정했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라는 아메리칸 드림 때문이었다. 미국은 세계에서 난민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다. 1975년부터 지금까지 30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난민은 종교, 인종, 국적,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UN난민고등판무관(UNHCR)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1540만명의 난민이 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매년 약 1%가 제 3국에 정착한다. 이 1%의 절반 이상을 수용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2012년 미국은 58,000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미국은1970년대 베트남 전쟁 후 90만명 가량의 베트남 난민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60만명 가량의 소련계 유대인 난민들, 2000년대 후반에는 이라크인 등 20만명의 중동 난민들을 대거 수용했다.
난민들이 미국에 들어오면 9개의 난민지원 기관들이 연방정부의 재정으로 난민들의 초기 정착을 돕는다. 이들은 미 전역의 22개 도시로 난민들을 보내는데 조지아는 캘리포니아, 텍사스, 뉴욕, 미시간, 워싱턴, 펜실베이니아에 이어 7번째로 난민들이 많이 가는 주다.
마누갓 가정의 미국 정착지는 조지아 내 클락스톤으로 정해졌고 2012년 5월 난민지원 기관들이 얻어준 아파트에 들어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마누갓의 어머니는 “캠프에서 17년을 살다가 화장실이 딸린 아파트에 처음 왔을 때 감격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난민들이 미국에 오면 정착지원금으로 일인당 1875달러를 일시불로 지급한다. 이 돈은 난민지원 기관들에게 전해지는데 이 돈으로 월세 아파트를 얻고 기본적인 가구, 음식, 옷을 구입하며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한 후 현재 한 사람당 900 달러의 현금이 지급되고 있다. 식구가 3명이면 2700달러를 현금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난민지원 기관들은 난민 가정마다 관리인을 붙여 3개월동안 이들의 초기 정착을 돕는다. 버스 등 대중교통 이용법, 시장, 약국 등의 위치, 영어클래스 및 학교 등록, 직업 소개 등을 도와준다. 3개월이 지나면 그때부터는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
클락스톤 내 난민들의 정착을 돕는 비영리단체인 시티호프의 로리 김 대표는 “난민 캠프에서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이 미국사회에 갑자기 뚝 떨어져서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라며 “정착지원금은 보통 3개월이면 다 쓰기 때문에 그 뒤에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낭패”라고 말했다.
난민들은 미국에 오면 일을 할 수 있는 신분을 보장받고 1년 뒤에는 영주권을 받으며 그 후 5년 뒤 미국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마누갓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에 들어와서 좋아했던 것도 잠시 미국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에 부딪혔다. 영어도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직장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마누갓 부모는 먼저 온 다른 난민들의 전철을 밟았다. 닭공장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마누갓의 어머니는 “남편과 같이 닭공장에 단순한 일을 합니다. 시간당 8달러를 받는데 그래도 둘이 버니까 생활은 됩니다”고 말했다.
부모가 아침 일찍 일을 나가면 마누갓은 남동생과 함께 학교에 간다. 처음에는 영어를 못해 수업을 못따라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나아졌다고 한다. 그는 “캠프에서는 학교가 없었는데 여기서는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어 좋습니다”고 말했다.
마누갓은 학교가 끝나고 집에오면 다른 난민 아이들과 축구를 한다. 마누갓 가정이 정착한 클락스톤의 아파트 촌에는 50여개국 출신의 난민들이 입주해있다. 클락스톤에는 1970년대 중산층 백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다.
그 뒤 이들이 돈을 벌어 외곽으로 떠나면서 빈 아파트가 늘자 1990년대 난민지원기관들은 아틀란타까지 버스로 갈 수 있는 클락스톤을 최적의 난민정착지로 보고 난민들을 이곳에 살게 했다. 지금은 클락스톤 인구의 80%가 난민들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난 11월 선거에는 소말리아 난민 출신이 처음으로 클락스톤 시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난민들이 입주한 아파트는 오래되어 허름했고 발코니에는 난민들의 빨래가 걸려있으며 거리에는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다녔다. 마누갓은 일요일이면 100여명의 다른 난민 아이들과 함께 인근 교회에서 가서 성경공부를 하고 태권도를 배운다. 클락스톤에 난민들이 증가하며 이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교회와 비영리단체들이 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한인이 운영하는 시티호프는 한인 중고등학생 및 대학생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난민 어린이와 중고생들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학교와 영어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일요일이면 난민 아이들을 일일히 차에 태워 교회로 데리고 가 성경 공부와 태권도를 가르친다.
지난 29일 다른 난민 아이들과 교회에 온 15살의 샬리아라는 네팔 난민 소년 엄마가 사준 아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부모님들은 영어를 못해 미국에 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자기는 좋다고 말했다. 한국의 K-POP도 좋아한다며 한국 가수의 이름을 말하기도 했다.
부모들이 돈을 벌면 난민 아이들이 제일 먼저 사달라고 하는 것이 아이폰이고 부모들은 평면 TV를 가장 먼저 산다고 난민단체 관계자들은 말한다.
부모와 형제들이 함께 일하는 난민 가족은 2,3년 뒤면 돈을 모아 더 나은 집으로 이사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클락스톤 내에 머물러 살고 있다고 한다.
마누갓 어머니는 마누갓이 교회에 간 사이 대형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왔다. 미국에 와서 좋으냐고 물으니 “좋죠. 자유도 있고, 기회도 있고, 돈도 벌고 애들도 학교 가고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케이아메리칸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