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사랑은 …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성경에서 우리가 아는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사랑장(고전 13장)’. 사도 바울은 이처럼 모순적인 말을 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면, ‘유익이 있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존 파이퍼 목사는 신간 <최고의 기쁨을 맛보라(좋은씨앗)>에서 이에 대해 답하고 있다. 바울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사랑하는 일을 즐거워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개인적 위안이나 안락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것.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기쁨을 얻길 기대하며 사랑을 실천하더라도, 사랑의 행위 자체가 갖는 도덕적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다.
이는 파이퍼 목사가 ‘기독교 기쁨주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끄집어낸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행복이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비성경적이고 참된 사랑과 거리가 있으며 결국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주장에 반기를 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듯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and)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지만, 이 ‘하고’를 ‘함으로써(by)’로 바꿔보자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고귀한 소명이 된다. 이는 세상의 ‘작은 기쁨’에 만족하다 ‘영원하고도 무한한 기쁨’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고통과 슬픔을 배제하거나 다른 이들의 아픔을 무시하는 ‘값싼 기쁨’과도 다르다.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듯, ‘더 낫고 영구적인 기쁨을 추구함으로써 ‘기꺼이’ 계속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 이는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은 선교사들의 증언이 한결같은 데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역설’은 책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파이퍼 목사는 “이 세상에서 부를 쌓기 위해 자신을 다 바치는 사람”을 현실감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인 것. 하지만 이것이 진리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그대로 다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금’을 변하지 않는 으뜸의 가치로 두지만, 그는 “금이야 시세가 오르내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가장 귀한 분으로 존재하신다”고 지적한다.
존 파이퍼 목사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C. S. 루이스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 현실의 위험과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기쁨의 신학, ‘기독교 기쁨주의’를 논증하고 있다. 그가 이 ‘작은 책’을 쓴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아름다움’이 우리의 숨을 멎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한 중심 단어 ‘기독교 기쁨주의(Christian Hedonism)’는 모순되는 두 단어를 결합한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원제는 ‘Dangerous Duty of De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