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보급 등으로 트위터(twitter)와 페이스북(Facebook)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어느새 우리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SNS는 중동에서 민주화를 이끌어내기도 했고, 유명 인사들과 직접 대화나 소통이 가능해졌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는 인기의 척도가 된지 오래다. 기업들은 SNS를 이용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홍보를 할 수 있게 됐으며, SNS에 남긴 글들을 책으로 엮어내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그 중에는 기독교 도서도 몇 권 있다.
SNS를 포함해, 최근에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풍부한 ‘말의 성찬’들이 이뤄지고 있다. 언론 기사에는 무수한 댓글이 달리고, 사람들은 기사와 댓글을 같이 읽는다. 또 블로그나 커뮤니티 등에서는 관심사를 공유한 이들끼리 활발한 논쟁이나 토론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렇듯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지고, 포털사이트만 접속해도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됐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찮다. 온라인에서 토론하던 중 분을 못 이겨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이러한 직·간접적 영향으로 자살 사고가 발생했으며, SNS에서는 이러한 자살 소동이 생중계되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편향되고 파편화된 정보들이 넘쳐나 사람들의 인식이 왜곡되고, 넘치는 소통 속에 오히려 ‘진정한 관계에의 욕구’는 더욱 결핍으로 치닫는다. 쏟아지는 말들이 때로는 ‘공해(公害)’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식욕의 절제를 넘어, ‘미디어욕’의 절제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사순절이 되면 즐기던 게임이나 TV 시청, 인터넷 접속, 스마트폰 사용 등을 자제하자는 ‘미디어 금식’ 문화가 생겨났다. 실제로 중요한 일이 있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할 때 “잠시 SNS를 떠나겠다”는 기독교인들의 고백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하지만, ‘미디어 금식’도 결국 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밖에 없다는 게 오늘날의 ‘역설적 현실’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그 ‘제목’ 때문에 관심을 끈 책이 바로 「페이스북 영성이 우리를 구원할까(홍성사)」이다. 저자는 ‘페이스북의 영성’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①‘원하는 사람을 골라’ 친구 요청을 보내고 ②친구 요청은 ‘선별해서 허락’하며 ③‘알리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④‘내키는 대로’ 로그아웃하며 ⑤‘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현대 기술은 정작 ‘옆 사람’을 선물로 여기지 않고, ‘쉽게 사귐을 만드는 기술’은 가까이 있는 사람과 더불어 사는 기쁨과 책임을 빼앗는다. 저자는 “여러 면에서 우리는 연결돼 있지만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데, 우리 사회는 이처럼 책임지지 않는 친밀함을 ‘간통’이라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조화로운 성장에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고, 인간은 구체적 공동체에 접붙여야 생명을 지키며, 그 생명은 공동체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정주하여 이웃과 신실한 관계를 맺는 것’이야말로 가장 충만한 삶이라는 것.
사실 이 책에서 ‘SNS 논란’은 분량으로나 비중으로나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 대부분을 ‘정주(定住)하는 삶’, 즉 “한 곳에 머물러 집중하자”는 주장에 할애한다. 공동체 루트바하우스에서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지난해 같은 출판사를 통해 「하나님은 복으로 장사하지 않는다」를 펴낸 저자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는, 이 작은 책의 제목을 원래 ‘The Wisdom of Stability(정주하는 삶의 지혜)’라고 달았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나 교회에서나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창 12:1)”,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네 소유를 팔아…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등 수많은 말씀을 통해 ‘노마드(nomad)’를 지향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두어 달 전 소개한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다(IVP)」만 봐도, 아예 하나님에 대해 “방랑자를 편애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저자는 4세기 ‘수도원 영성’과 이를 따른 자신의 삶으로 답을 대신한다. 범죄율이 아주 높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서 공동체를 조직해 ‘정주’하고 있는 저자는, 자신을 포함해 1700년 전 구도자들이 사막으로 떠난 이유는 새로운 곳에 “머무르기 위해서”였다고 답한다. 성경에서도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렘 29:5)”,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눅 8:39)” 등 ‘정주하는 삶’을 선물로 주시는 장면들이 있다.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설교만을 듣고, 취향이 같은 사람들과만 교제한다면 결코 성장할 수 없다. 구체적인 사람들과 구체적인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시대정신의 노예’나 ‘맛집 순례객’을 벗어나, “늘 새로워지겠다는 고백”으로서 머무름을 선택하라고 권유한다. “정주하는 삶이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불어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달려 있듯, 우리를 괴롭히는 이웃을 기꺼이 상대하고 피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