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40여일간의 터널을 지나 부활의 새 아침이 밝았다. 그러나 사회 한쪽에서는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의료기술의 발전 등으로 '100세 시대'가 눈앞에 와 있지만, '마음의 고통'으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거나(자살) '육신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죽여줄 것을 요구하고(안락사) 있는 것. 부활절을 맞아, 다시 사신 주님께서 허락하신 새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영혼의 문제에 대해 되짚어보자.
죽음을 논리적으로만 보면, 자살에도 일면 긍정의 요소가?
'아이비리그(Ivy League) 3대 명강의'로 알려지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셸리 케이건(Shelly Kagan) 예일대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 믿음과 영혼 등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는 증거나 주장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소위 '논리와 이성'으로만 죽음과 영혼, 그리고 자살과 안락사에 대해 논의하겠다고 말한다.
케이건은 '사후 세계도, 영혼도 없다'는 전제로 논의를 풀어나간다. 한 마디로 '죽으면 끝'이라는 입장.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로 남아있지만, 그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이 질문은 착각에 불과하다. 죽은 다음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삶이 끝난 상태에서 삶이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혼'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논지를 펼친다. 일단 영혼은 물질적 존재가 아니므로 오감(五感)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며, 오로지 내적 감각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내면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감각들과 여러 생각 또는 느낌들이 영혼 자체는 아니므로, 이를 인정할 수 없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이원론자'들은 그 근거로 '육체가 합목적적으로 움직이며, 이는 어떤 외부 존재가 미리 프로그램을 집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나쁜 것일까? 케이건은 "죽음이 끝이라 믿는다면,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며 "내가 없는데, 대체 무엇이 내게 나쁠 수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죽음이 나쁜 건, 오직 '살아있는'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에게다.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간다." 그렇다고 죽지 않는 것, '영생'도 반드시 좋은 것일 수 없다. 결국 죽음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핵심적 근거는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빼앗아간다'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일 뿐 '유일한 이유'는 될 수 없다.
우리 모두 죽는다는 사실 즉 '죽음의 필연성'은 대단히 슬픈 것이지만, 오히려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얼마나 살지,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누구도 모르는 '죽음의 가변성, 편재성'도 마찬가지다. 죽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박탈' 때문이므로,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기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축복을 누려야 하는데, 목표가 너무 높으면 그만큼 실패 위험도 높아지며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들은 성취 가능성이 매우 낮으므로 현실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목표를 선택해야 한다.
인간이 죽을 운명이라 해서 자살이 당연한 선택 중 한 가지가 될 수는 없지만, 도덕성과 합리성 관점에서 자살이 때로는 적절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이 그만큼 고통스럽다면 아마 그 사람은 차분하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므로, 자살 시도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회복 가능성을 영원히 포기하는 셈이어서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신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에', '삶이라는 선물에 적절한 감사의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케이건은 이처럼 '그만의 방식'으로 삶을 긍정하고 자살에 반대한다.
그의 결론은 이러하다. "우리는 누구나 죽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와서,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찜찜한 느낌이다.
안락사 논의하기 전, '과도한 조치' 문제 해결이 먼저
이에 반해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 및 강연자였던 스캇 펙(1936-2005)은 <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Denial of the Soul)>에서 의학적·정신질환적 관점들을 충분히 고려하여 안락사와 자살에 대한 문제들을 살핀다. 원래 불교도였던 그는 스테디셀러 <아직도 가야 할 길(이상 율리시즈)> 집필 이후 기독교인이 됐고, 경험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는 입장에서 글을 썼다.
펙은 전문가적 입장에서 안락사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이 아닌, 다른 문제점을 제기한다. '과도한 조치'에 대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불치병 말기 환자의 수명을 늘리려 의료적으로 '과도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체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환자가 고통에 못 이겨 '안락사(존엄사로 포장된)'를 선택하는 데 있어 통증에 대해 적절한 처치를 하지 않는 부분을 지적한다. '과도한' 약물 투여로 부작용이나 중독이 유발될까 진통제를 주저하는 것은 '의료 범죄'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맞을 때 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으리라는 두려움을 갖고, 안락사를 고려한다고 펙은 말한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과정이 오로지 공포스럽고 길며 쓸데없이 고통스럽다면, 그 전에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게 합리적으로 느껴지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처럼 병원이 죽어가는 이들에게 '최적의 장소'가 되지 못하면서 늘어나는 곳이 '호스피스'로, 여기서는 치료보다 '적절한 통증 완화'에 중점을 둬 환자가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더 복잡한 문제는 고통의 실체가 없는 '정서적(심리적) 고통'이다.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펙은 '인간의 조건'이란 "종종 우리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를 존재로 살아감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우리 의지가 외부 세계의 현실과 충돌할 때마다 우리는 심리적 고통을 겪으면서 그 싸움을 경험하는 '사회화' 가운데 일어나는 복잡한 일인 것이다. 그 싸움을 회피하거나 포기하려 할 때 '안락사' 문제가 제기된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면, 완전히 달라지는 시각
이밖에 살인과 자살, 자연사에 대해 검토한 후, 스캇 펙은 안락사를 아주 '세속적인 현상'이라 진단한다. 그리고 자살도 큰 틀에서 안락사의 범주로 여기고 이야기를 해 나간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부정"이 확산되는 데서 나타난 결과로 본 것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늘 연결돼 있다고 느껴왔고, 이를 "하나님이 내 삶의 이면에 숨어 이 모든 것 너머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 존재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 '영혼'의 문제에 거의 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쥐고 있는 세속주의자들은 영혼을 부정하고 있다. 영혼이 곧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을 '하나님이 창조하고 기르시는, 고유하며 발전적인 영원한 인간 정신'이라 정의(定義)내린다. 이 정의에서, 안락사와 자살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나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는지를, 죄를 미워하는 것이지 죄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나는 자살 대부분을 죄로 간주하며, 특히 교만의 죄로 여긴다. 그들 대부분은 스스로에게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내가 내 삶의 창조자니까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어' 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단한 교만이다."
그는 덧붙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다. 내가 한 송이 장미나 아이리스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나 자신 또한 창조할 수 없다. 꽃을 가꾸고 관리할 수 있지만, 꽃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양육하고 관리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의 창조자도 아닐 뿐더러 나 자신의 소유물도 아니다. 나의 부모, 문화와 함께 하나님이 나를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영혼은 학습과 배움에 의해 성장하는 존재다. 하지만 안락사는 그 기회를 차단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 자체를 부정해버림으로써 신으로 향하는 길을 단절시킨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속이고, 우리 자신까지 속인다. '죽음'과 그에 이르는 과정도 영혼을 가진 존재에게는 성장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영혼은 셸리 케이건이 부정했지만 '불멸'하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하다.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들, 자신이 죽을 시간을 선택하고 자신의 통제 아래 깔끔하게 죽겠다는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거부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죽음을 부정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책의 원래 제목처럼 '영혼을 부정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부정하지만, 이를 부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사람은 빠른 속도로 성숙해진다. "임종시의 고백과 대화는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커다란 성장을 불러온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진실해지고 아주 빠르게 결정한다." 죽음에 이른 순간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쁨이자 특권인데, 이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에도 언급됐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잘 나타나 있다.
안락사 대응보다, 영혼의 성장 독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더 중요
저자는 이 글을 16년 전인 1997년 미국에서 펴냈다. 하지만 소위 '존엄사' 문제가 이제 막 논의되기 시작해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는 우리나라 실정과는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영혼'의 문제에서 그러하며, 심지어는 <고민하는 힘>으로 유명한 재일학자 강상중 도쿄대 교수도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을 말하는 신작 <살아야 하는 이유(이상 사계절)>에서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에 '종교', '믿음'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통 중인 환자는 자신의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하겠지만, 스캇 펙은 '인생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신비다', '인생은 우리 계획과는 별도로 그냥 일어나는 일이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조언한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는 결정을 하기보다, 차라리 그 문제에 맞서기 위해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배울 점이 많을 거라고도 덧붙인다. 그러므로 '조력 자살'을 하나의 권리로 인정하려는 극단적 변화는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하지만 저자는 '안락사 논쟁' 자체가 더 뜨겁고 격렬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에 대해 무관심한 사회가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논의가 법학자와 윤리학자, 의사와 간호사, 신학자와 사회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서 뜨거워질수록 사회는 건설적이면서도 빠르게 근본적인 문제들을 쉽게 공론화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전제에는 반드시, '영혼'이 있어야 한다.
"영혼은 안락사보다 더 큰 주제다. 진정으로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안락사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갈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영혼과 영혼의 성장을 독려하는 사회를 원하는가의 여부다. 거의 모든 안락사 논쟁의 복합성은, '우리는 영혼과 영혼의 성장을 독려하는 사회를 원하는가?' 라는 간단한 질문 하나로 해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