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대 교황에 선정된 아르헨티나 추기경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하고, 이름에 걸맞는 검소와 소탈의 파격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12세기 가톨릭 성인이자 비기독교인들도 한 번쯤은 들어본 ‘평화의 기도’를 쓴 것으로 잘 알려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타임지>가 2000년을 앞두고 지난 1천년간 등장한 인물 중 가장 중요한 10인 중 한 명으로 종교계 인사로는 마르틴 루터와 함께 유일하게 선정될 만큼, 서구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이에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제야 처음 탄생한 것 자체가 의외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최근의 책을 꼽자면 포이에마의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가 있다. 지난 2010년 나온 이 책은 일화 중심의 감상적·낭만적 ‘포장’이 아닌, 철저하게 ‘복음적’인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의 ‘맨얼굴’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저자인 로렌스 커닝햄(노트르담대)은 오랫동안 성 프란치스코를 깊이 연구해 온 인물이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시절 그저 방탕한 부잣집 아들에 불과했으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여러 차례 회심을 경험한다. 나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통해 사치와 천박함으로부터 회심하면서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거부하게 됐다. 그는 인생의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 위해 자신의 세속적인 옷가지들을 벗어던졌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깨달았을 때 그는 옛 삶을 버리고 가난한 그리스도를 뒤따르기 위해 자선에 의지해 살아가는 떠돌이 평신도 설교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의 활동과 회심은 시대적 산물이기도 했다. “사막에 피어난 외로운 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회복하자는 ‘십자군’이 한창이던 시절 ‘십자가’의 회복을 부르짖었다. 심지어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십자군과 무슬림 간의 전쟁터를 가로질러 술탄을 만났다. 그는 술탄 앞에서 무력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복음을 전하면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라는 뜻의 진정한 ‘십자군’이 됐다”.
또 무역과 자본의 발달로 물질적인 부가 강조되던 시절 이 모두를 내어던지고 ‘가난’과 결혼한 성자가 됐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들만의 방식을 교황에게 승인받고 활동을 재가받기 위해 간단한 생활회칙을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수도원이 아닌 ‘길 위에’ 자주 있었고, 자산에서 나오는 고정수입으로 삶을 꾸리던 성직자들과 달리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갔고, 궁핍할 땐 성직자에게 금지됐던 탁발을 했다.
“그의 손과 발에는 못자국이 생겼고, 앞뒤로 찔린 상처가 드러났으며, 그의 옆구리에는 선명한 창상이 나타났습니다(코르토나의 엘리아스).” 프란치스코의 몸에 나타났다는 오상(stigmata·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입은 다섯 가지 상처)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상처의 특성에 일관된 견해가 없고, 일찍이 중세 영성가들의 글 가운데 그런 예가 등장하는지 여부는 학자들에게 맡겨야 할 주제”라고 말한다.
프란치스코는 ‘자연의 성인’이기도 했다. 일화 ‘새들에게 한 설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동물들을 사랑했고 나아가 태양과 달과 별, ‘어머니 지구’에서 나는 꽃과 과일 등 자연세계의 아름다움을 사랑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물질세계를 죄악되고 벗어나야 할 것으로 여긴 카타리파 교도들에 대한 직접적인 ‘꾸지람’이기도 했다. 프란치스코에 대한 지나친 감상주의를 경계하라는 뜻이다.
종합하면 저자는 “그를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낸 인물로 보려는 시도는 지나친 단순화”라며 “이는 오히려 프란치스코를 광범위한 가톨릭의 개혁과 영성 전통 속에서 보지 못하도록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개신교 학자 폴 사바티에의 책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야기>에 대한 가톨릭의 반발에서 기인했다. 사바티에는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선포했으나,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프란치스코 수도회”라면서 프란치스코를 일종의 ‘원초적 복음주의자’로 묘사한 것. 그러나 저자는 사바티에의 견해를 오늘날 모두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저자는 “프란치스코의 삶은 ‘복음’ 그 자체였고, 그에게 복음서는 명상을 위한 책이 아니라 삶을 위한 행군 명령이었다”고 전한다. 프란치스코는 ‘종교적 가난’을 당시 수도원 전통처럼 단순히 물건을 나눠주는 일로 이해하지 않고, 땅이나 수입도, 궂은 날을 위해서도 모아둔 것이 전혀 없는 ‘무소유의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열망을 깊이 ‘살아냈고’, 그리스도의 가난한 출생과 갈릴리에서의 방랑생활,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 등을 추구해야 할 ‘가난의 전범’으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는 성경 문자주의자이다.” 그리고 복음적 가난의 실천을 인내하고 참아내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삼았다는 점이 다른 이들과 달랐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로 시작되는 기도문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사실은 20세기 초에 쓰였다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을 덧붙였다. 진실은 이렇다. ‘프란치스코적 감수성’을 반영한 이 기도문은 1913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발간된 소박한 대중잡지에 익명으로 처음 게재됐고, 1915년 가톨릭 주간지 ‘소베니르 노르만드(Souvenir Normand)’ 창간인 마르끼 들 라 호슈튀롱이 다른 기도문들과 함께 이를 당시 교황에게 보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어서 이 기도문은 여러 차례 반복 회자됐지만, 이 때만 해도 프란치스코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러나 1916년 바티칸 신문 ‘오서바토레 로마노(Osservatore Romano)’에 실린 후 프란치스코회에 속한 한 프랑스인이 한 모금행사 포스터에 프란치스코가 이 기도문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이름과 결합되기 시작했다. 포스터에는 “이 기도문은 프란치스코회의 이상을 잘 요약하고 있으며 우리 시대의 긴급한 현안에 대한 응답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설명이 실렸다. 저자는 이에 대해 “기도문의 기원과 확산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지금 우리는 이 기도문이 성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것에 대체로 수긍할 것”이라며 “이 기도문의 영적 메시지 뿐 아니라 문체도 성인과 일치하고 있고, 그의 관후한 영혼에도 잘 들어맞는 헌사”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