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학교에서나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설교 연습을 통하여 실전 설교를 훈련시키는 커리큘럼이 있다. 필자도 고 김희보 박사와 박희천 교수에게서 혹독한 비평을 달갑게 받으면서 설교의 담금질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목회일선에 나선후에는 별다른 비평없이 제 잘난 맛에 설교 가도를 질주해 왔다. 사모의 단편적 감상을 비평의 반열에 올린다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이고, 성도들의 은혜받았다는 달콤한 말에 익숙해져서 그 누구에게도 따끔한 설교비평의 일침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까닭에 이제와서 후배들의 설교를 감놔라 콩놓아라 할 주제는 아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어떤 부류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부하가 치밀어 속 상할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도대체 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중한 말씀을 서푼도 안되는 허접한 언어의 유희나, 참 용감하게도 입에서 나오는대로 쏟아놓으니 참으로 낯뜨거워서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다. 만약 내게 에레미야나 에스겔의 용기가 있다면 단에서 내려오는 설교자를 조용한 골방으로 데려가 눈물이 쏙빠지도록 혼줄을 내주고 싶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이지 신상발언의 시간이 아니다.
어떤 예배학에서는 광고조차도 예배의 일환으로 치는 까닭에 지극히 공적인 광고외에는 삼가하거늘 하물며 설교시간에는 말할것도 없다. 용서하고 들으세요 하고 운을 떼면서 끝간데 없이 자신의 개인사를 말하는 것은 금해야 할 일이다. 왜 용서 받아야 할 일을 금쪽같은 설교시간에 할애하는가!
하기는 그토록 강해설교로 존경받던 고 옥한흠 목사조차도 어쩌지 못하였으니 나같은 필부목사야 비평이 가당키나 한 노릇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는 한다. 그가 후임목사에게 한 편지중에 "강해 설교가 좀 약한 편이지만 사랑의교회 강단에서 섬기게 되면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하여 나를 능가하는 탁월한 설교자가 될 것이다. 3년만 지나면 사랑의교회는 세상이 대적하지 못할 말씀과 성령의 큰 능력으로 무장한 제자 공동체가 될 것이다." 라고 기대했는데 이렇게 토를 달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나의 이런 확신이 가끔 흔들리는 것 같아 고민이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전에 목회서신으로 말고 직접대면하여 따끔하게 설교비평을 해주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따라서 나는 더 늦기전에 후배들의 설교를 비난이 아닌 사랑의 비평을 해 줄 참이다.
왜냐하면 목사라 할지라도 설교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는 까닭이며, 한 번 증거된 설교는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설교를 통하여 영혼들이 죽기도하고 살리기도 하며, 섣부른 설교를 통해서는위로받아야 할자가 상처를 받고 마땅히 견책을 받아 마땅할 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그런 웃지 못할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설교비평을 즐거움으로 받는자는 설교의 미학을 터득하는 자가 된다.
[정인량 칼럼] 설교비평의 미학
워싱턴영광장로교회 정인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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