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성공은 설교자가 로고스를, 에토스를 가지고 어떻게 파토스에 잘 적용하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설교자 가운데는 설교의 중심이며 핵심인 로고스를 알지 못하고 따라서 체험치 못한 자들이 간혹 발견된다. 이렇게 되면 그가 제아무리 크리소스톰과 같은 황금입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에토스는 거짓이 되며 당연히 파토스에 접근할수 없게 된다.
철학에 있어 로고스는 사물의 존재를 한정하는 보편적인 법칙과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을 인식하고 이를 따르는 분별과 이성을 말하지만, 신학과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란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의 화육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정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로고스에 대한 강조가 한국신학과 신앙에서 소홀함에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신학교에서는 성경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예 입학을 허가치 않는데 매우 현명한 입학사정이 아닐수 없다. 로고스에 무지하거나 체험치 못한자는 설교자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나 선교나 어떤 기관에서 일한다고 하더라도 목사는 설교자인 까닭에 로고스에 정통하고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이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광의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구약과 신약 총 66권의 성경을 꿰뚫고 있어야 하지만, 특히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그 로고스가 설교자안에서 화육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선재성, 성육신, 동정녀탄생,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 승천, 중보, 재림, 심판주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막힘이 없어야 하고 그래서 심중에 레코딩된 설교가 설교문없이도 쏟아져 나와야 한다. 또 이 로고스를 설교함에 있어 교회사에 나타난 살아있는 실증들을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로고스를 케리그마안에서만 고집하는 설교자가 제법되어 초짜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영광스런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함으로 해서 성공적인 로고스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한국 교회가 윤리적 설교에 치중하였음으로 해서 이런 반동적 설교가 한때 신선함을 주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또 아직 이 케리그마가 자신들 만의 전유물인양 왜곡하는 일부 사이비 이단들도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십자가만이 로고스라 생각하면 그들의 에토스는 쉽게 피로감이 누적될 것이고 파토스에 이르러서는 아예 귀를 막게 될 것이다. 에토스는 성격, 관습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혼을 지성적 부분과 비지성적 부분으로 나누고, 비지성적 부분 중에서 습관에 의해 지성적 부분으로 되는 감정적 능력을 에토스라 하였다. 그리고 파토스는 철학상의 용어로 정념(情念)•충동•정열 등으로 번역되며 근본적인 뜻은 ‘받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광의로는 어떤 사물이 ‘받은 변화상태’를 의미하고, 협의로는 특별히 ‘인간의 마음이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정의를 채택한다면 설교자가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구태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 즉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를 대입시켜 본다면 설교자는 듣고 행동에 옮길만한 가치가 있는 로고스를 전달하여야 하며, 다음으로 설교자의 에토스는 일단 그 의도가 순수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런것이 전제로 됐을 때 청중의 파토스와 설교자는 온전히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을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인량 칼럼] 설교자와 로고스의 관계
워싱턴영광장로교회 정인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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