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준비하다가 중국의 ‘갈관자(鹖冠子)’라는 책에 등장하는 죽은 사람도 살렸다는 ‘편작(扁鵲)’이라는 의사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삼형제 중 막내였는데, 형제 모두가 의사였답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알려지지 않고 오직 ‘편작’만 명의로 소문이 났습니다. 어느 날 위왕이 편작을 불러 물었답니다. “삼 형제 중에 누가 가장 뛰어난 의사냐?”고 말입니다. ‘편작’은 “큰 형님이 가장 뛰어나고, 다음은 둘째 형님이고, 자신이 가장 아래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이 의아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당신의 의술이 가장 형편없다면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말입니다. 편작의 대답은 “큰 형님은 환자가 아픔을 느끼기 전에 얼굴빛을 보고 장차 병이 있을 것을 압니다. 병이 나기 전에 병이 날것을 알고 원인을 제거해 줍니다. 둘째 형님은 환자의 병세가 미미할 때 병을 알고 치료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환자의 병이 커지고, 고통으로 신음할 때 비로소 병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맥을 짚어보고, 약을 먹이고, 도려내고 수술을 하기 때문입니다.”

‘편작’의 첫째 형과 둘째 형은 병이 생기기 전에, 깊어지기 전에 치료해 준다는 말입니다. 환자의 측면에서 보면 가장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갈때까지 가서 손쓸 겨를조차 없는 상황에서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아픔을 겪은 후에야 그 치료를 인정하고 감사합니다.

참 의미 깊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 속에서 위기를 만나고, 믿음을 통해 역사를 경험해야 신앙 깊은 감사를 표현합니다. 사실 아프기 전에 자신을 돌보시고,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는 한편에 밀어 놓고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숨 쉬고, 고통 없이 살아가는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어딘가 고장이나 아픔을 맛본 후에 존재의 가치를 감사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언제인가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도울 때 조심해서 도우세요. 도와주는 것도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렵다고 하면 그 소리 나오기가 무섭게 해결해주면 안 돼요. 자기가 잘나서 잘 풀린 줄 압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면 제 보따리 내놓으라고 난리 치는 게 세상입니다. 그러니 다 죽어 갈 때까지 가만두세요. 다 죽었다 싶을 때 손 내밀어 주면 그때야 진짜 은인으로 생각해요.”라고 말입니다.

씁쓰름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변의 시선조차 개의치 않고 주님을 찾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에게 치료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고 말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감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키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편 이런 생각이 머리를 자꾸 사로잡습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서운하신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씀이란 생각이 말입니다. 이 서운함으로 찾으시는 모습이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겉으로 드러나 긴박한 중에 누리는 은혜도 소중하고 가치 있습니다만 그보다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지키시고, 섭리하시며 악의 세력과 어둠 가운데 동행하시며 보호하시는 우리 주님을 기억하시고, 찾기 전에 그 앞에 설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Kisung
Dec 16,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