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비의 山이 회색의 손아래 점령당하여야 했을까
금빛 돔과 파란 빛 타일 두텁게 쌓여
신도 벗고 끌려 들어가야 하는 세상적인 강요가
왜 덮쳐 졌을까
그랬어도, 당당하게 입성하는 自由함의 意志여
빨간 카펫이 현란하게 둘렀어도
바위 가운데, 말 발자국 네 개가 패었어도
말의 승천이 하늘에 비상했다 하였어도
가식의 만화 같은 설화로만 그려지는..
그 지하층 아래 자리한, 모리아의 신비
마음 중심의 희생 바쳐진 바위 제단
외 핏줄이 통곡 제물로 바쳐진 순종의 제단 앞에서
나의 힘 다 漂白되는 찰라
바다 깊이 沈澱하는 믿음 의지의 무계가
바위에 부딪쳐서
또 부딪쳐서
光彩로 눈부시게 閃光을 일으켜서
나는 몸 밖으로인지, 안으로인지 쏟아져 내리는
自由 함
內部에서 發顯하는,
최종 응답으로의 한 만남으로
鎔鑛爐를 헤쳐 나와 대체될 제물 양이
은 빛 발광체로 飛上하는
모리아 산의 神秘에서
휩 쌓이는 몸 떨림_
그대로 우리의 聖地로의 들 뜬 마음으로 어느 사이, <통곡의 벽>을 돌아서 흰색 푸른 색 타일로 반짝이는 회회敎의, 자신 나름대로의 성지 앞에 찾아 들었습니다. 사실은 나의 마음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로만 가득 차 있는 성지 찾음의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이 우리로서는 우리의 신앙의 또 한자리 중심지로 여겨질 모리아 山地 중앙에서, 느닷없이 신발이 벗겨서 끌려들어가다 시피 들어서야 한 자리는, 의 외로 빨간 카펫에 주변 가득 뒤 덮인 바윗덩어리였습니다. 거기에 꼭 만화 이야기를 듣듯이, 바위의 커다란 4군데의 자국이 패여진 바위를 가리키며, 마호멧이 말을 타고 승천했다가 귀환한 말 발자국 바위라고 설명을 합니다. 아무래도 꾸미어 낸 소리로만 들릴 수밖에 없는 설화였습니다. 무어라고 하든,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리아 산에 드렸던, 외아들 <이삭>을 드리려고 칼을 처 들었다가 하얀 커다란 수산양을 대신 받아내어, 제사 드렸던 그 놀라운 바위가 그 아래 지하층에 의젓이 놓여있는 자리를 내려가 만나 볼 수 있었던 감격이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사건 현장에서, 내게 떠오르는 얼마의 신앙 象徵性을 마음 아래에 되새겨지게 하는 의미가, 더 크고 강하게 사겨져 왔습니다. 간혹 씩 당면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가장 절박함의 시간을 맞을 때, 우리는 어떻게 몸과 마음가짐을 다듬어야 할까 하는 몸 떨림에서, 찾아내 가게 하는 몸 자세였습니다. 현실 현장에서의 절박함 당함의 면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순종의 몸가짐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自由 함>을 발견하는 절박하고 순결한 마음 자세, 즉 깨끗한 어린 양의 모습의 끝 갈데없는 <自由 함>을 발견한다는, 그 값진 의미임을, 여기 아브라함 바위 앞의 자세를 통하여 얻는, 육중하고도 값진 의미로서의 새 마음 발견함 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 지금도 이 <순결한 자유 함>을 우리 생활 현실의 절벽 앞에서, 신앙인은 간혹 씩 찾아내고는 합니다.
금빛 돔과 파란 빛 타일 두텁게 쌓여
신도 벗고 끌려 들어가야 하는 세상적인 강요가
왜 덮쳐 졌을까
그랬어도, 당당하게 입성하는 自由함의 意志여
빨간 카펫이 현란하게 둘렀어도
바위 가운데, 말 발자국 네 개가 패었어도
말의 승천이 하늘에 비상했다 하였어도
가식의 만화 같은 설화로만 그려지는..
그 지하층 아래 자리한, 모리아의 신비
마음 중심의 희생 바쳐진 바위 제단
외 핏줄이 통곡 제물로 바쳐진 순종의 제단 앞에서
나의 힘 다 漂白되는 찰라
바다 깊이 沈澱하는 믿음 의지의 무계가
바위에 부딪쳐서
또 부딪쳐서
光彩로 눈부시게 閃光을 일으켜서
나는 몸 밖으로인지, 안으로인지 쏟아져 내리는
自由 함
內部에서 發顯하는,
최종 응답으로의 한 만남으로
鎔鑛爐를 헤쳐 나와 대체될 제물 양이
은 빛 발광체로 飛上하는
모리아 산의 神秘에서
휩 쌓이는 몸 떨림_
그대로 우리의 聖地로의 들 뜬 마음으로 어느 사이, <통곡의 벽>을 돌아서 흰색 푸른 색 타일로 반짝이는 회회敎의, 자신 나름대로의 성지 앞에 찾아 들었습니다. 사실은 나의 마음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로만 가득 차 있는 성지 찾음의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이 우리로서는 우리의 신앙의 또 한자리 중심지로 여겨질 모리아 山地 중앙에서, 느닷없이 신발이 벗겨서 끌려들어가다 시피 들어서야 한 자리는, 의 외로 빨간 카펫에 주변 가득 뒤 덮인 바윗덩어리였습니다. 거기에 꼭 만화 이야기를 듣듯이, 바위의 커다란 4군데의 자국이 패여진 바위를 가리키며, 마호멧이 말을 타고 승천했다가 귀환한 말 발자국 바위라고 설명을 합니다. 아무래도 꾸미어 낸 소리로만 들릴 수밖에 없는 설화였습니다. 무어라고 하든,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리아 산에 드렸던, 외아들 <이삭>을 드리려고 칼을 처 들었다가 하얀 커다란 수산양을 대신 받아내어, 제사 드렸던 그 놀라운 바위가 그 아래 지하층에 의젓이 놓여있는 자리를 내려가 만나 볼 수 있었던 감격이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사건 현장에서, 내게 떠오르는 얼마의 신앙 象徵性을 마음 아래에 되새겨지게 하는 의미가, 더 크고 강하게 사겨져 왔습니다. 간혹 씩 당면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가장 절박함의 시간을 맞을 때, 우리는 어떻게 몸과 마음가짐을 다듬어야 할까 하는 몸 떨림에서, 찾아내 가게 하는 몸 자세였습니다. 현실 현장에서의 절박함 당함의 면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순종의 몸가짐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自由 함>을 발견하는 절박하고 순결한 마음 자세, 즉 깨끗한 어린 양의 모습의 끝 갈데없는 <自由 함>을 발견한다는, 그 값진 의미임을, 여기 아브라함 바위 앞의 자세를 통하여 얻는, 육중하고도 값진 의미로서의 새 마음 발견함 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 지금도 이 <순결한 자유 함>을 우리 생활 현실의 절벽 앞에서, 신앙인은 간혹 씩 찾아내고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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