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메타나의 몰도우 음악 흐르는 오토방100 하이왜이
속도의 길옆으로 유유히 흐르는 몰도우 강물 따라
숲속 기슭 타고 올라 선 소담스런 생활, 담아 안은 집들,
흐르고 흘러, 스치는 나뭇잎 가지 사이사이에 눈부시게 떨어지는 햇살

특유의 검은 빛 四角처마 기우러진 지붕 건물들 넘어
언덕 비탈에 유네스코 유산이라는 길쭉한 드높은 둥근 탑
어린아이 둘이 둥근 기둥타고 기어오르는 모습으로
눈 안, 멀리로 비처 들어오는데
어느 결, 프라하 햇빛 아침을 맞는다.

체코의 국립박물관 묵직하게 버텨 선 건물 벽 ,
홍. 청색 현수막 기 드리워 내린 오페라 하우스
그 앞을 지나쳐 보내면
나타나오는 프라하의 봄 광장에는 햇살 함께 아래쪽으로 드넓게
광장 거리 따라, 아침 태양 빛 받아 흘러내리고
전설의 황제 바즐레프 의 말 탄 검은 동상 아래로
수백 명, 공산당 오랜 억압의 기세를 향해, 항거하며
쏟아져 나온 저항 군중들
수십 대의 검 녹색 탱크가 드르르 뭉개버리는 主義思想
겉껍질 옷으로 잔뜩 덮은 욕망의 마스카 살상,
견디다 못해, 2 젊은 두부체크의 생명, 분신으로 비릿하게 항거 했던가
그 자리, 동상 아래의
명찰 동판 위에는, 누군가 아직도 젖은 생화 얹어 놓은, 눈물 묻은 손길

즐비하게 상점들 앞길, 人道의 무늬장식 자갈길, 발 내디디며
숙연한 마음, 무겁게 젖어 내 그림자를 밟는데
우뚝이 솟아오른 화려한 건물 덩어리마다, 올려붙여 놓은 조각상들에
자주 내 눈길 끌어 올려놓는 사이,
연인들의 웃음 담아 번지는 해맑은 소리가
만물상 건축물 광장거리 골목 사이사이로 묻어 흘러들고

강물 위 <까롤>황제 다리 넘어 로 흘러 내려가는 물살 따라
햇살 반사하는 잔디에는, 짝진 연인들의 끝 갈데없는 담소가 잔잔히 풀 밭 아래 가라앉아
높이 솟구쳐 오른 돌 교각 둥근 아치 탑 아래로, 내 그림자 하나, 석상처럼 남겨 놓을 가


오늘의 시 해설은 다음 프라하 섭렵 시를 올릴 때에, 함께 간결하게 해설 올리기로 하고, 오늘은 시에 대한 이해에 작은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올려야 하는 분위기를 감지하면서, 그리 길지 않는 설명을 잠간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문학예술에 있어서, 몇 장르가 놓여 있습니다. 산문 및 수필문학, 단편소설, 장편소설, 논문작품, 희곡작품, 시 등등이 되겠습니다. 이 장르 이외에, 기독교신앙시 詩作家도 있습니다. 이 기독교신앙시에 대하여는 다음 가까운 기일 안에, 나름대로의 이야기 견해를 나누기로 맘 잡아 봅니다.

오늘은 문학예술의 일반 장르들 중에서 특히 논문작품과, 눈으로 읽는 희곡작품 그리고 시에 대하여서는, 일반 읽어 내려가기가 수월한, 위에 열거한 그 다른 장르보다 좀 읽어내려 가기가 그리 쉬웁 지가 않게 느껴지는, 그래서 문학 작업 창작에서 비교적 수월치 않게 읽어 내려가게 될 수 밖에 없는 작품 활동 작업 수행 이행에 그 이유 가닥의 한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요즘 일반 신문에 떠오르는 일반적 시들을 읽어 볼 때에도, 그 작업 수행 이해가 그리 쉬웁 지 않다는 것을 쉽게 섭렵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존재합니다. 첫째로 시는 시 작업현장에서 시를 즐기는 독자의 입장과 함께, 시 作業人들은, 저들 마음에 복잡다단한 인간 생활현장에서의 정신적 심상 작업 표현이, 오늘날의 학문 작업 활동들이 어려움만큼 복잡다단함을, 몇 마디의 단축된 언어로 표현해 내려고 하는 데서 온다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시 한 줄, 한 단어 사이에 여러 변화무쌍한 정신세계 관계 연관 작업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는 한 번 읽고서, 이해하려는 것을 피하고, 두 번, 세 번을 되짚어 읽어내면서 그 안에 함축된 의미를 찾아내는 동안, 거기 담겨진 달콤한 진미뿐 아니라 오히려 시를 읽어내는 입장에서, 큰 환희를 발견해 내게 되는 이유입니다. 또한 다른 시간에도, 같은 시를 탐독하는 동안 그 때마다 또 다른 환희의 카다르시스도 펼쳐지군 합니다.

한국 시단에 이 시도를 이루어 낸 유명한 시대가 이상(李霜)을 비롯하는 1930년대 중반에서, 이 시도가 이루어졌고, 이 분들의 시에서, 그 시를 잘근 잘근 씹어내 가면서, 그 달콤하고 감미로운 진미를 찾아 내오게 된 이유가 됩니다. 쉬운 이해의 비유를 댄다면, 좀 질긴 고기를 씹고 씹는 동안 그 달콤한 맛을 입 안에서 자아내는 비유가 그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시를 읽기가 어렵다고들 말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 깊은 작업현장의 시인의 고민과 고뇌가 함축되어 녹아 있기 때문에, 좀 어렵다고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그 진미의 맛을 찾아내게 되면, 너무도 정신적인 맛이 감미되어 있음을 발견케 되어, 더더욱 혼자서도 즐거움을 되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상, 박인환의 시들이 그러하였고, 얼마 전에 작고하신 현대 시인 김춘수의 시, 또 서정주의 시, 김현승의 시들은 한 번 읽고서 그 심미의 맛이 읽는 즉시 즉시 찾아내 지지가 않습니다. 시 예술만이 아니라, 오늘 세대의 繪畵(그림), 및 조각들이 그렇고, 음악의 심미감이 바로 이런 줄기를 타고, 인간 고뇌와 합쳐져서, 그 진가를 발견하게 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전 시대의 읽기 쉬웠던 단순했던 가벼운 서정시들에서는, 복합적인 현대인이 찾고 싶어 하는 정신세계 추적에서, 그런 시류는 오히려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고, 또 현실 시 감각세계에서 前時代의 감각으로, 버려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서 읽어서 오늘 시대적 감각에서 너무나도 싱거워져 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는 다른 장르와 다르게 짧은 언어로써, 함축을 담은 적립된 언어표현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해설 짓고 싶습니다. 시는 누구나 우연히 집어서 읽는 시를, 서 너 번 되짚어 생각을 담아 볼 때에, 차츰 그 시와 함께,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는 고민과 고백이 함께 합쳐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맛 속에, 차츰 차츰 깊은 자신의 마음속을 되짚어 보며, 거기 찾아오는 희열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