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데오’란 (coram Deo') 라틴어로 'coram' 은 '앞에'라는 뜻이고, 'Deo'는 '하나님'을 말하므로 합해서, '하나님 앞에서' 라는 뜻이다. 이는 사도 바울과 칼빈의 생의 좌우명이었으며 중세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가치관이었다. 오늘날도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모든 이들의 삶의 지표는 당연히 '코람데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앞에서 살려고 애쓰는 모습보다는 사람 앞에서(coram hominibus)'사는 누추한 모습들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특히 교권주의는 코람데오의 정신을 말살시키고 권세인앞에 줄세워 손비비게하는 세상풍속을 따르게한다. 목불인견의 인간숭배가 태연자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세상권세 못지않게 교권이 하늘을 찌를듯 한 까닭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지고 인간은 점점 더 높아지는 일들이 더 이상 교회와 교단에 판 치지 못하게 하려면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되돌와야 하는데 아무래도 중세의 종교개혁 못지않은 개혁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 이다.

긍정신학의 대가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우리의 초점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무오한 규칙인 성경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개혁은 우리의 초점을 개개인의 자아존중의 거룩한 권리에로 되돌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벌써 그가 그토록 목놓아 외쳤던 적극적 사고방식은 무너져버렸다. 그가 그토록 자랑했던 크리스탈쳐치는 문을 닫아 버렸다. 하나님앞에서 인간앞으로 회귀를 목청높여 주장했던 그는 꽁꽁 숨어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국 긍정신학의 선두주자 모 목사의 형편은 어떤가? 그도 로버트 슐러보다 나을것이 전혀없는 지경에 이르러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왜 그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의 이유를 이제 우리는 뒤늦었지만 철저히 깨닫고 회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코람호미니부스는 여전히 다른 방법으로 살아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텍사스의 기린아 죠엘 오스틴은 로버트 슐러의 쌍생아라고 할만큼 인간 중심의 메세지를 현란하게 전하므로 인기 상종가이다. 하지만 우리는 곧 텍사스발 조종을 듣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코람데오 정신을 배제한 까닭이다. 그러나 척필레같은 하나님앞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코람데오 정신의 회복을 기대한다.

이제 가을이다. 노회와 총회가 열리는 교단 정치의 계절이다. 코람데오로 나갈지 코람호미니부스로 나갈지를 정하는 것은 교단이 아니라 교단에 속한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베드로의 정신이 오늘의 목사들에게 깊이 각인될 수만 있다면, 하나님앞에서 행하는 선한 정치행위가 이곳 저곳에서 아름다운 소식으로 들려 오게 될 것이다. 코람데오의 삶은 짐이 아니다. 코람데오는 은혜받은 자의 결국인 까닭에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다. 그것은 시편기자들의 무수한 노래 속에 담겨져있다. 하나님면전에서 우리는 종이나 노예가 아니며 그의 친 자녀인 까닭에 그를 기쁘시게 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코람데오의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