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자랑하는 요리집마다 최고의 요리가 있듯이 나라마다 그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요리가 있어서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최고의 대접을 위해 반드시 그 나라를 대표하는 특별한 요리가 등장한다. 러시아의 최고요리는 ‘귀머거리 새’ 요리라고 한다. 오리 비슷하게 생긴 이 귀머거리 새는 희귀종이기 때문에 잡기 힘들어 러시아인들 중에도 이 귀머거리 새 요리를 먹어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옐친대통령이 저녁만찬에 이 귀머거리 새 요리를 내놓았다. 그런데 옐친이 한-러 정상회담에서 귀머거리 새 요리보다 더 기가막힌 선물을 내놓은 것이 있다.
그것은 6.25전쟁에 관한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내용이 담긴 비밀문서였다. 이 문서에 의해 6.25가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족주의 통일전쟁이 아니라 스탈린과 모택동, 김일성의 한반도 공산화 계획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이라는 것이 증명 되었고 김일성이 주체성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스탈린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문서 이전까지는 일각에서 북한에 동조하여 북침이라고 주장했던 것이 날조된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남침인 것이 명명백백해졌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설령 북한이 남침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민족내부에서 분단국가를 통일하려는 민족주의 통일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는지 확인됐다.
이 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남침계획을 내놓자 스탈린은 미군이 개입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면서 망설인다. 김일성은 이에대해 “주한미군이 다 철수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다시 들어오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남한에는 우리에게 호응할 30만명의 지하 노동당원이 기다리고 있다. 8일이면 남한을 해방 시킬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의 오판이 문제다. 오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오판에 대한 확신이다. 당시 남한에는 김일성에게 오판에 대한 확신을 줄 만큼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남한에는 실제로 남로당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의 사주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회적 혼란을 가중 시키는 가운데 국론은 사분오열 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자신들에게 호응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통일은 조만간 북한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것이 북한이 빠진 함정이었다.
김일성이 결정적으로 실수한 것은 트루만 대통령의 판단을 오판한 것이었다. 미국이 절대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만에게 밤에 전화로 “대통령 각하,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 남한이 위험 합니다”라고 보고 했을 때 트루만 대통령은 주저않고 그 자리에서 미군파견을 지시했다. 만약 이때 트루만이 우유부단하여 의회지도자들과 의논하느라고 며칠 우물쭈물 했더라면 김일성은 그의 주장처럼 8일 만에 부산까지 내려와 적화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6.25전쟁의 영웅으로 맥아더 원수를 꼽는데는 이견이 없다. 그의 과감하고 신속한 군대 투입과 전략적 판단이 승전의 중요한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6.25 전쟁 승리의 백미인 인천 상륙작전이 그의 작품이다. 맥아더는 휴전을 반대했다. 이번 기회가 한국이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확신했다. 그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전을 우려한 트루만은 고집을 꺾지 않는 그를 해임시켰다. 이점이 분단국가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트루만의 실수라고 생각하기 쉽다. 트루만의 실수만을 지적한다면 그의 공적을 모르는 소치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 전쟁의 영웅이라면 트루만 역시 그렇다. 어쩌면 한국전쟁의 진짜 영웅은 트루만 대통령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동상 하나쯤은 미군이 처음 전투에 참가해 장렬히 전사한 오산이나 대전에 세워져야 한다.
트루만의 신속한 결단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김정은을 위하여 배를 굶어 가며 중노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트루만이 당시 긴급 소집된 안보회의에서 미국이 왜 한국을 적극 방어해야 하는가에 대해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 했을때 연합국이 재빨리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그와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으로 백악관 회의기록에 남아있다. 해마다 6월 25일이면 새삼스레 트루만 대통령이 위대한 대통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 있어 결단력은 매우 중요하다. 영향력이 큰 중요한 위치에 있을 수록 더하다. 우유부단은 약한것과 같고 비겁한 것과 같다. 실패를 자초하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트루만의 결단은 많은 희생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그의 결단으로 한국 전쟁 3년간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등 13만명이상의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참전용사들이 평생을 불구로 지내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미국 젊은이가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것이다. 워싱턴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광장 입구에 새겨진 글을 읽으면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아는 세대가 있고 모르는 세대가 있다. 6.25를 겪은 세대와 겪지않은 세대의 차이다. 6.25를 모르는 세대가 알아야할 것이 있다. “Freedom is not Free”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Our nation honor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그것은 6.25전쟁에 관한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내용이 담긴 비밀문서였다. 이 문서에 의해 6.25가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족주의 통일전쟁이 아니라 스탈린과 모택동, 김일성의 한반도 공산화 계획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이라는 것이 증명 되었고 김일성이 주체성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스탈린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문서 이전까지는 일각에서 북한에 동조하여 북침이라고 주장했던 것이 날조된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남침인 것이 명명백백해졌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설령 북한이 남침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민족내부에서 분단국가를 통일하려는 민족주의 통일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는지 확인됐다.
이 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남침계획을 내놓자 스탈린은 미군이 개입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면서 망설인다. 김일성은 이에대해 “주한미군이 다 철수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다시 들어오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남한에는 우리에게 호응할 30만명의 지하 노동당원이 기다리고 있다. 8일이면 남한을 해방 시킬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의 오판이 문제다. 오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오판에 대한 확신이다. 당시 남한에는 김일성에게 오판에 대한 확신을 줄 만큼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남한에는 실제로 남로당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의 사주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회적 혼란을 가중 시키는 가운데 국론은 사분오열 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자신들에게 호응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통일은 조만간 북한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것이 북한이 빠진 함정이었다.
김일성이 결정적으로 실수한 것은 트루만 대통령의 판단을 오판한 것이었다. 미국이 절대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만에게 밤에 전화로 “대통령 각하,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 남한이 위험 합니다”라고 보고 했을 때 트루만 대통령은 주저않고 그 자리에서 미군파견을 지시했다. 만약 이때 트루만이 우유부단하여 의회지도자들과 의논하느라고 며칠 우물쭈물 했더라면 김일성은 그의 주장처럼 8일 만에 부산까지 내려와 적화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6.25전쟁의 영웅으로 맥아더 원수를 꼽는데는 이견이 없다. 그의 과감하고 신속한 군대 투입과 전략적 판단이 승전의 중요한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6.25 전쟁 승리의 백미인 인천 상륙작전이 그의 작품이다. 맥아더는 휴전을 반대했다. 이번 기회가 한국이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확신했다. 그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전을 우려한 트루만은 고집을 꺾지 않는 그를 해임시켰다. 이점이 분단국가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트루만의 실수라고 생각하기 쉽다. 트루만의 실수만을 지적한다면 그의 공적을 모르는 소치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 전쟁의 영웅이라면 트루만 역시 그렇다. 어쩌면 한국전쟁의 진짜 영웅은 트루만 대통령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동상 하나쯤은 미군이 처음 전투에 참가해 장렬히 전사한 오산이나 대전에 세워져야 한다.
트루만의 신속한 결단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김정은을 위하여 배를 굶어 가며 중노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트루만이 당시 긴급 소집된 안보회의에서 미국이 왜 한국을 적극 방어해야 하는가에 대해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 했을때 연합국이 재빨리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그와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으로 백악관 회의기록에 남아있다. 해마다 6월 25일이면 새삼스레 트루만 대통령이 위대한 대통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 있어 결단력은 매우 중요하다. 영향력이 큰 중요한 위치에 있을 수록 더하다. 우유부단은 약한것과 같고 비겁한 것과 같다. 실패를 자초하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트루만의 결단은 많은 희생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그의 결단으로 한국 전쟁 3년간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등 13만명이상의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참전용사들이 평생을 불구로 지내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미국 젊은이가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것이다. 워싱턴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광장 입구에 새겨진 글을 읽으면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아는 세대가 있고 모르는 세대가 있다. 6.25를 겪은 세대와 겪지않은 세대의 차이다. 6.25를 모르는 세대가 알아야할 것이 있다. “Freedom is not Free”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Our nation honor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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