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의 기나긴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광야의 연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되새기기 위해서 모세는 모든 백성들 앞에서 긴 설교를 합니다. 광야생활을 분석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김질하는 설교를 합니다. 두번째 선포, 두번째 설교, 반복된 말씀이라는 의미를 가진것이 ‘신명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실제 광야에서의 삶을 대비하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확인 시켜줍니다. 광야생활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의 삶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광야생활을 거울삼아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한 구체적인 삶을 가르치고 다짐하는 설교가 신명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시한번 선포하고 백성의 다짐을 받습니다. 특별히 신명기 28, 29장에 와서 축복과 저주의 설교를 하고 모든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아멘’합니다.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붙어 있습니다. 종이 한 장 차이요, 글짜 한 자 차이입니다. 손바닥과 손등, 배와 등 차이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결코 함께할 수 없는 것이 축복과 저주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또 모세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지난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모세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모든 백성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받는 길에 대해 비장한 마음으로 긴 설교를 합니다. 그는 이 설교가 마지막 설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 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보고 네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3:25-27)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하고 기준과 원칙은 분명합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재해석이면서 말씀의 결론에 대한 재선포입니다. 다시한번 확인시키고 다시한번 확실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축복과 저주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28장의 축복의 말씀과 29장의 저주의 말씀이 긴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오직 한 가지 기준에 따라 달라집니다. 바로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시작부분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것을 강조하고, 신명기 30장에 와서 다시한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부종하라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마음과 성품을 다해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인도하여 줄 것이라 선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면이나 충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하나님자신을 담보로 한다는 데서 변경 불가능과 필연적 성취의 절대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모르느냐고, 그것이 쉬운 일이냐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찌보면 쉬운 일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죄인인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육신적 본능은 어떻게 해서라도 쉽고 편하게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사는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냐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돈을 더 많이 버는것이냐가 중요합니다. 축복은 목적이라기보다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 결과가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축복이 목적이 되버리면 하나님조차 축복의 도구로 전락해버리게 됩니다.
축복이 목적이 된 사람이 축복을 받으면 더 좋은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크리스챤이 되기 쉽습니다. 겸손해지기 보다 교만해지고 더 헌신하고 희생하기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이 됩니다. 축복을 위해 살려고 할 때에 축복보다 연단이 먼저 오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축복보다 중요한 것이 축복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축복보다 축복받는 사람을 중요시 하시고 사랑하셔서 먼저 연단을 통해서 축복이 축복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 다음에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말씀대로 살기 어렵다는 이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말씀으로 살려면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서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충돌하여 영육간에 갈등과 고통이 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이겨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극복하는 사람보다 타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과정때문에 말씀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렵다는 사람이 어려운 이유는 육신의 소욕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된다고 하지만 안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이 자기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놓지 않고 있는것입니다. 예를들어 새벽에 못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안일어나는 것입니다. 새벽은 누구나 피곤합니다. 그러나 새벽에 출근해야 되는 직장에 취직하면 새벽에 잘 일어납니다. 육신의 소욕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자기 생각을 포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나 자신을 포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것을 어렵다고 변명하거나 합리화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속인 결과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거두게 됩니다.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고 먼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신30:11-14)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붙어 있습니다. 종이 한 장 차이요, 글짜 한 자 차이입니다. 손바닥과 손등, 배와 등 차이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결코 함께할 수 없는 것이 축복과 저주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또 모세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지난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모세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모든 백성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받는 길에 대해 비장한 마음으로 긴 설교를 합니다. 그는 이 설교가 마지막 설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 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보고 네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3:25-27)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하고 기준과 원칙은 분명합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재해석이면서 말씀의 결론에 대한 재선포입니다. 다시한번 확인시키고 다시한번 확실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축복과 저주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28장의 축복의 말씀과 29장의 저주의 말씀이 긴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오직 한 가지 기준에 따라 달라집니다. 바로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시작부분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것을 강조하고, 신명기 30장에 와서 다시한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부종하라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마음과 성품을 다해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인도하여 줄 것이라 선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면이나 충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하나님자신을 담보로 한다는 데서 변경 불가능과 필연적 성취의 절대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모르느냐고, 그것이 쉬운 일이냐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찌보면 쉬운 일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죄인인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육신적 본능은 어떻게 해서라도 쉽고 편하게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사는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냐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돈을 더 많이 버는것이냐가 중요합니다. 축복은 목적이라기보다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 결과가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축복이 목적이 되버리면 하나님조차 축복의 도구로 전락해버리게 됩니다.
축복이 목적이 된 사람이 축복을 받으면 더 좋은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크리스챤이 되기 쉽습니다. 겸손해지기 보다 교만해지고 더 헌신하고 희생하기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이 됩니다. 축복을 위해 살려고 할 때에 축복보다 연단이 먼저 오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축복보다 중요한 것이 축복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축복보다 축복받는 사람을 중요시 하시고 사랑하셔서 먼저 연단을 통해서 축복이 축복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 다음에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말씀대로 살기 어렵다는 이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말씀으로 살려면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서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충돌하여 영육간에 갈등과 고통이 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이겨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극복하는 사람보다 타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과정때문에 말씀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렵다는 사람이 어려운 이유는 육신의 소욕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된다고 하지만 안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이 자기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놓지 않고 있는것입니다. 예를들어 새벽에 못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안일어나는 것입니다. 새벽은 누구나 피곤합니다. 그러나 새벽에 출근해야 되는 직장에 취직하면 새벽에 잘 일어납니다. 육신의 소욕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자기 생각을 포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나 자신을 포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것을 어렵다고 변명하거나 합리화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속인 결과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거두게 됩니다.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고 먼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신30:11-14)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