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가 올해 6월 유치원을 졸업하고, 새 학기가 되면 초등학교 일학년이 된다. 우리 집에서 발언권이 가장 세고 영향력이 가장 큰 존재이기도 하다. “저 애가 언제 커서 우리가 좀 자유롭게 되려나?”라고 했는데, 벌써 커서 엄마의 부엌일도 도와주고, 아빠의 잔심부름은 8학년이 되는 언니와 경쟁적으로 다투며 해준다. “아이고, 저것이 없었으면 이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반감되었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사실 네 명의 사내아이를 낳고 난 후, 우리는 “딸 가지는 복은 없구나”라고 자체 포기했었다. 그러나 “이왕이면 딸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다섯 번째 아이를 가졌었다. 우리는 아이를 가지면, 적어도 임신 8개월까지는 병원에 가질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속에 잉태된 생명을 너무 인간이 들여다보고 파헤치는 것이 괜히 싫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들이냐? 딸이냐?”는 태어나는 순간 고추가 달렸으면 아들, 그렇지 않으면 딸을 주셨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어느 해 봄, 짙은 어둠이 깔린 새벽 4시 45분, 우리 부부는 다섯 번째로 그렇게도 기다렸던 딸을 맞이한 것이다. 그 때의 기분은 이상야릇한 것 이상, 아빠의 마음을 완전히 움켜잡았다.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한 딸을 품에 안고 있노라니, 얼마나 사랑스럽고 신비스러운지 몰랐다. 그런데 찬찬히 바라보면서, 왠지 사내아이들과는 달리 아기자기하고 예쁜데, 딸 아이 홀로 외롭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딸 자매를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중 여섯째를 가졌는데, 태어날 때 보니까 또 우람한 사내아이였다. “할 수 없구나”라고 딸 자매 갖는 것은 단념하고, 그렇게 5년 남짓 지났다. 아이를 더 원하고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생명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일곱째를 맞이하였다. 낳을 때보니, 드디어 딸이었다. 그래서 딸 자매를 얻게 되었다.
사실 고백이지만, 아내도 자유로워지고, 심방과 전도 등 나들이도 함께 갈 수 있고 이제 막 좋은데, 어린 아이를 또 가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아이가 대학까지 졸업하고, 시집갈 때까지 뒷바라지 하려면, 우리 부부에게는 노후도 반납된 삶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막내 딸 아이가 태어난 날, 생명 있음을 알리며 힘차게 울어대는 아이를 품에 안고 쳐다보면서, 나의 생각은 확 달라져 버렸다. “너와 같이 노후에도 젊고 즐겁게 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막내 딸 아이가 커가면서 재롱을 떨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종종 사람들이 “일곱 명 참 많이 낳았네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와이프가 믿음이 좀 있었으면, 열둘 정도는 되었을 텐데...”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하였다. “집안이 시끌시끌하겠네요?”라고 물으면, 나는 “밤늦게 돌아와 둘러보면, 다 자고 있어 조용하던데요.”라고 대답한다. “그래 사모님이 일곱 명 낳고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요?”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나는 “애들은 낳아놓으면 저절로 큰 것 같은데요.”라고 시치미 떼며 말하곤 한다.
지난 7월 중순경이었다. 셋째 아들이 군 훈련을 마치고 졸업하는 날, 아내는 군복 잘 차려 입고 찍은 아들의 사진을 받아보며 흐뭇해하면서, "믿음이 있었으면, 열둘도 낳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드디어 말한 것이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바라보니까, 한 술 더 떠서 "예이, 이제 와서 참 아쉽다!"라고 진지한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진즉 그런 믿음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라도 생명에 대한 믿음을 가져서 다행이야!"라고 나는 빙긋이 웃으며 응수하였다.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요, 지부장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라고 했던가?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길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한 생명을 이 세상에 내어보낼 때 다 각자 먹고 살 복록(福祿)과 사명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시고, 모든 초목은 다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저마다의 존재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뜻일 게다. 우리는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녀에 대해서도 이러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감사하게도, 우리를 만나고 교제한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얼마 후에 잠금장치를 풀고 40대에 아들을 낳는 사람, 바쁜 비즈니스와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에 아이를 지우려다가 우리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딸을 낳아 감사해 하며 잘 키우는 사람, 둘만 낳으려다가 셋째와 넷째를 가진 사람들 등 오묘한 생명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많다. 나의 주변의 사람들과 아내의 친구들은 서둘러서 적어도 둘째 혹은 셋째와 넷째, 심지어 다섯째까지 가지며 따라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늦게라도 다행히 생명에 대한 믿음이 아마 생겨서일 것이다.
김병은 목사(MD 한사랑장로교회 담임) 410-852-0999, bekim111@yahoo.com
사실 네 명의 사내아이를 낳고 난 후, 우리는 “딸 가지는 복은 없구나”라고 자체 포기했었다. 그러나 “이왕이면 딸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다섯 번째 아이를 가졌었다. 우리는 아이를 가지면, 적어도 임신 8개월까지는 병원에 가질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속에 잉태된 생명을 너무 인간이 들여다보고 파헤치는 것이 괜히 싫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들이냐? 딸이냐?”는 태어나는 순간 고추가 달렸으면 아들, 그렇지 않으면 딸을 주셨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어느 해 봄, 짙은 어둠이 깔린 새벽 4시 45분, 우리 부부는 다섯 번째로 그렇게도 기다렸던 딸을 맞이한 것이다. 그 때의 기분은 이상야릇한 것 이상, 아빠의 마음을 완전히 움켜잡았다.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한 딸을 품에 안고 있노라니, 얼마나 사랑스럽고 신비스러운지 몰랐다. 그런데 찬찬히 바라보면서, 왠지 사내아이들과는 달리 아기자기하고 예쁜데, 딸 아이 홀로 외롭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딸 자매를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중 여섯째를 가졌는데, 태어날 때 보니까 또 우람한 사내아이였다. “할 수 없구나”라고 딸 자매 갖는 것은 단념하고, 그렇게 5년 남짓 지났다. 아이를 더 원하고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생명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일곱째를 맞이하였다. 낳을 때보니, 드디어 딸이었다. 그래서 딸 자매를 얻게 되었다.
사실 고백이지만, 아내도 자유로워지고, 심방과 전도 등 나들이도 함께 갈 수 있고 이제 막 좋은데, 어린 아이를 또 가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아이가 대학까지 졸업하고, 시집갈 때까지 뒷바라지 하려면, 우리 부부에게는 노후도 반납된 삶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막내 딸 아이가 태어난 날, 생명 있음을 알리며 힘차게 울어대는 아이를 품에 안고 쳐다보면서, 나의 생각은 확 달라져 버렸다. “너와 같이 노후에도 젊고 즐겁게 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막내 딸 아이가 커가면서 재롱을 떨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종종 사람들이 “일곱 명 참 많이 낳았네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와이프가 믿음이 좀 있었으면, 열둘 정도는 되었을 텐데...”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하였다. “집안이 시끌시끌하겠네요?”라고 물으면, 나는 “밤늦게 돌아와 둘러보면, 다 자고 있어 조용하던데요.”라고 대답한다. “그래 사모님이 일곱 명 낳고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요?”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나는 “애들은 낳아놓으면 저절로 큰 것 같은데요.”라고 시치미 떼며 말하곤 한다.
지난 7월 중순경이었다. 셋째 아들이 군 훈련을 마치고 졸업하는 날, 아내는 군복 잘 차려 입고 찍은 아들의 사진을 받아보며 흐뭇해하면서, "믿음이 있었으면, 열둘도 낳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드디어 말한 것이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바라보니까, 한 술 더 떠서 "예이, 이제 와서 참 아쉽다!"라고 진지한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진즉 그런 믿음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라도 생명에 대한 믿음을 가져서 다행이야!"라고 나는 빙긋이 웃으며 응수하였다.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요, 지부장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라고 했던가?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길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한 생명을 이 세상에 내어보낼 때 다 각자 먹고 살 복록(福祿)과 사명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시고, 모든 초목은 다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저마다의 존재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뜻일 게다. 우리는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녀에 대해서도 이러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감사하게도, 우리를 만나고 교제한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얼마 후에 잠금장치를 풀고 40대에 아들을 낳는 사람, 바쁜 비즈니스와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에 아이를 지우려다가 우리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딸을 낳아 감사해 하며 잘 키우는 사람, 둘만 낳으려다가 셋째와 넷째를 가진 사람들 등 오묘한 생명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많다. 나의 주변의 사람들과 아내의 친구들은 서둘러서 적어도 둘째 혹은 셋째와 넷째, 심지어 다섯째까지 가지며 따라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늦게라도 다행히 생명에 대한 믿음이 아마 생겨서일 것이다.
김병은 목사(MD 한사랑장로교회 담임) 410-852-0999, bekim111@yahoo.com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