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시 노만, 레온타인 프라이스와 같은 쟁쟁한 흑인여가수를 좋아 하지만 영감의 알토 마리안 앤더슨이나, 천상의 꾀꼬리 소프라노 케슬린 배틀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앤더슨은 겸손의 대명사요, 배틀은 교만의 화신이란 점에서 다르다. 앤더슨은 필라델피아 빈민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음악학교 지원에 떨어졌으나 1925년 뉴욕 필하모닉이 후원하는 콩쿨에 합격해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을 가지므로 일약 흑인으로서는 최초의 여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가지는 등 유럽 각국에서 수백회에 달하는 순회 공연을 가졌다. 당시 최고 지휘자였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그녀는 백년에 한 번 나올만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여전히 앤더슨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차별 대우를 받았는데 1939년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공연장 측에서 돌연 취소하므로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무료 야외 연주를 가졌고 7만 5천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음악회가 끝난 후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별과 고통은 처음엔 좌절을 주지만 나중엔 나를 강하게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앉아 있지 말고 주님을 위해 일어나 일하십시오.” 195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 무도회의 점쟁이 울리카 역을 제의했는대 당시 그녀의 비중애 비해 너무도 빈약한 역이었지만 서슴치않고 수락 최선을 다했다. 이후 비로소 흑인 가수들이 오페라 극장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영국 여왕을 위해 베푼 앤더슨의 독창회가 성공리에 끝나자 한 기자가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날이 언제였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나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남의 집 빨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던 그 날이었습니다."고 고백하였다. 한번은 어떤 연주여행에서 만난 한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그녀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사인을 하며 앤더슨이 학생에게 “오늘 저녁 음악회에는 오실 거죠?”라고 물었더니, 학생은 돈이 없어 못간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아베 마리아'를 불러주었다는 것이다. 1953년 한국 전쟁 때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 부산을 찾은 그녀가 마땅한 연주회장을 찾기 어렵자 한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가설무대에서 노래하여 수많은 피난민을 위로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영혼으로 부르는 Deep River를 좋아한다. "깊고 맑은 요단강 건너 내 집 주님 계신 곳 그리운 고향에 기리도다 오 돌아가리라 주님 계신 곳 언약하신 집 요단강가의 주님 만나리라 깊고 맑은 요단강 건너 내집에 깊은 요단강 나 건너가 주님 만나리라"
내가 케슬린 배틀의 노래를 처음 듣게 된것은 1989년 고 이수만 장로의 음악실에서 였다. 그는 클래씩광으로서 최고의 오디오와 수백장의 LP판과 수도 헤아릴수 없는 CD 그도모자라 VHS 비디오 테이프를 소장하고 주말이면 지인들을 불러 수준높은 감상회를 주도하고는 하였다. 그에게서 선물받은 오디오를 최근까지 소장하다 후배들에게 물려주었다. 지금은 한갑의 나이를 훌쩍 넘겼을 그녀이지만 내가 처음본 베틀은 흑인으로서는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선녀와 같은 미녀였다. 그녀가 들려주는 노래는 꾀꼬리와 같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마리안 앤더슨과는 또 다른 프리 마돈나인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디바 그 자체이다.
베틀은 1948년 8월 13일 미국 오하이오주 포츠머스에서 강철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의 일곱 번째 아이로 태어났던 만큼 음악과는 관계없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13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고 1972년에 신시내티 오케스트라의 성악오디션에서 발탁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제임스 레바인이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눈에 띄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스타’가 되었다. 그런대 이 만인의 디바는 너무도 높아져 공연 시간에 지각은 다반사요, 공연중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라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의 무대 연기력은 너무도 뛰어나 화면 앞에서라도 부라보 갈채를 보내지 않을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앤더슨과 같은 겸손을 더 했다면 리릭소프라노로서의 그녀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 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전히 앤더슨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차별 대우를 받았는데 1939년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공연장 측에서 돌연 취소하므로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무료 야외 연주를 가졌고 7만 5천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음악회가 끝난 후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별과 고통은 처음엔 좌절을 주지만 나중엔 나를 강하게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앉아 있지 말고 주님을 위해 일어나 일하십시오.” 195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 무도회의 점쟁이 울리카 역을 제의했는대 당시 그녀의 비중애 비해 너무도 빈약한 역이었지만 서슴치않고 수락 최선을 다했다. 이후 비로소 흑인 가수들이 오페라 극장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영국 여왕을 위해 베푼 앤더슨의 독창회가 성공리에 끝나자 한 기자가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날이 언제였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나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남의 집 빨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던 그 날이었습니다."고 고백하였다. 한번은 어떤 연주여행에서 만난 한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그녀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사인을 하며 앤더슨이 학생에게 “오늘 저녁 음악회에는 오실 거죠?”라고 물었더니, 학생은 돈이 없어 못간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아베 마리아'를 불러주었다는 것이다. 1953년 한국 전쟁 때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 부산을 찾은 그녀가 마땅한 연주회장을 찾기 어렵자 한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가설무대에서 노래하여 수많은 피난민을 위로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영혼으로 부르는 Deep River를 좋아한다. "깊고 맑은 요단강 건너 내 집 주님 계신 곳 그리운 고향에 기리도다 오 돌아가리라 주님 계신 곳 언약하신 집 요단강가의 주님 만나리라 깊고 맑은 요단강 건너 내집에 깊은 요단강 나 건너가 주님 만나리라"
내가 케슬린 배틀의 노래를 처음 듣게 된것은 1989년 고 이수만 장로의 음악실에서 였다. 그는 클래씩광으로서 최고의 오디오와 수백장의 LP판과 수도 헤아릴수 없는 CD 그도모자라 VHS 비디오 테이프를 소장하고 주말이면 지인들을 불러 수준높은 감상회를 주도하고는 하였다. 그에게서 선물받은 오디오를 최근까지 소장하다 후배들에게 물려주었다. 지금은 한갑의 나이를 훌쩍 넘겼을 그녀이지만 내가 처음본 베틀은 흑인으로서는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선녀와 같은 미녀였다. 그녀가 들려주는 노래는 꾀꼬리와 같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마리안 앤더슨과는 또 다른 프리 마돈나인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디바 그 자체이다.
베틀은 1948년 8월 13일 미국 오하이오주 포츠머스에서 강철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의 일곱 번째 아이로 태어났던 만큼 음악과는 관계없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13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고 1972년에 신시내티 오케스트라의 성악오디션에서 발탁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제임스 레바인이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눈에 띄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스타’가 되었다. 그런대 이 만인의 디바는 너무도 높아져 공연 시간에 지각은 다반사요, 공연중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라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의 무대 연기력은 너무도 뛰어나 화면 앞에서라도 부라보 갈채를 보내지 않을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앤더슨과 같은 겸손을 더 했다면 리릭소프라노로서의 그녀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 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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