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르트뱅글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어렸을 적 부터 익숙하였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덕분이다. 금성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그의 조근 조근한 클래씩 음악해설을 통하여 토스카니니의 연주를 마치 눈으로 보는 것 처럼 빨려 들고는 하였다. 그가 '아루투르 토스카니니'라고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 애쓰던 다정한 음성이 공명되어 지금도 생생히 들려온다.

그가 들려준 파가니니의 일화이다. "영국 템즈 강변에서 한 거지 노인이 낡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구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때 웬 낯선 외국인이 그를 측은히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제게 돈은 없지만 저도 바이올린을 좀 다룰 줄 아는데 대신 몇 곡 만 연주해 드리면 안되겠습니까?' 거지노인은 바이올린을 건네 주었다 그런데 그가 활을 당기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 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거지노인의 모자에는 순긱간에 돈이 쌓이게 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저 사람은 바로 파가니니다!' 라고 그는 바이올린의 명연주자로서 런던에 연주차 왔다가 잠시 산책하던 길이었다. 낡은 바이올린 이지만 누구의 손에 의해 연주 되느냐에 따라 그소리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은 고가의 오디오를 소장하고 있는가에 딸려 있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한다. 지금은 아침마다 고급 헤드폰에 아이폰에 내장된 판도라의 기라성같은 거장들의 고전음악을 입맛대로 들으며 산책을 하지만 옛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모노톤의 그런 다정함을 느낄수 없다.

토스카니니는 근시안이라 대부분의 연주를 암보를 통하여 지휘하였다 한다. 그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찬가 요청을 단 칼에 물리쳤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다. 파쇼로부터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정열적인 연주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는 이탈리아인 특유의 다혈질의 성격으로 연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악보를 찢는 등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휘봉이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손수건이나 윗옷을 찢기도 했다 한다. 그가 '노! 노!'라고 불같이 호령을 하여 단원들은 그런 그를 '토스카노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으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반면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전생이 아니었나 싶게 그 귀족적 가정 배경이 흡사하다. 푸르트뱅글러의 아버지 아돌프(Adolph Furtwangler)는 당시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고고학자(考古學者)로서 베를린 대학 고고학 교수였다. 그의 어머니 아델라는 피아노 연주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여성으로 푸르트뱅글러가 최초로 피아노 레슨을 받은 것도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당시 뛰어난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막스 폰 실링스가 15살된 푸르트뱅글러에게 지휘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토스카니니가 우연한 기회에 대타로 지휘봉을 잡게 된 것처럼 그도 18세가 되던 해에 뮌헨에서 행해진 연주회의 대리 지휘자로 나서게 됨으로써 지휘자로서의 소양을 높이 인정받게 되었다. 곧 젊은 신예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순식간에 퍼져서 푸르트뱅글러는 곳곳에서 객원 지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평생의 염원이었던 베를린 필의 객원 지휘를 하게된다. 곧 이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함으로써 죽을 때까지 지휘자로서의 그 명성을 유지하게 된다. 푸르트뱅글러는 유태인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게르만의 혈통을 간직하고 있어 히틀러는 바로 이 점을 높이 사서 그를 프로이센 추밀원(樞密院) 고문으로 임명해 버렸다. 물론 푸르트뱅글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이 2차 대전 후, 그가 전범(戰犯)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된 이유였던 것이다. 그의 지휘인생은 당시대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굴곡에 찬 것이었다. 그가 토스카니니처럼 미국으로 망명했다면 오늘의 음악사는 다른 면으로 전개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카라얀이 나치정권에 잠간 희생제물이 되었다면 푸르트벵글러는 그의 전성기 대부분을 사상과 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통영의 딸 사건으로 한국의 나폴리라고 하는 통영이 시끌벅적하다. 통영은 윤이상의 고향이기도 한 까닭이다. 안익태와 윤이상은 한국이 나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라고 할 수 있다면 이들의 정치적 행보와 사상의 편향은 앞으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