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 주인이 픽업을 하면 셔츠를 다리게 되고, 샌드위치 가게 주인이 픽업을 하면 샌드위치를 만들게 된다는 이야기다. 과거 이민사회는 제한된 정보와 언어, 문화 등의 장벽들로 인해 이민 생활에 처음 도움을 준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언제든 필요한 정보와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시대다. 반면 넘치는 정보의 홍수와 피상적인 관계망은 오히려 이민자들의 삶은 더 큰 공허함과 괴리감을 안기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기본적으로 ‘멘토(Mentor)’의 자리에 있다. 삶의 방향을 찾고 있는 젊은이들이나 인생의 공허함을 채움 받고자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까지 목회자들은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해답을 주고 이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영적인 멘토’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멘토란 무엇이며, 그들 자신의 멘토는 누구일까?

애틀랜타 기독일보에서는 ‘멘토’라는 화두를 갖고 지역 목회자들을 찾아 이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또한 이들이 누군가의 멘토가 되고 있다면, 어떠한 멘토가 되고자 하는지 그 진솔하고 뜨거운 마음을 [나의 멘토 이야기]에서 풀어 내볼 계획이다.


▲부르심교회 담임 나용호 목사
[나의 멘토 이야기] 두 번째 주인공은 부르심교회 담임 나용호 목사다. 2008년 교회를 개척해 길고 긴 준비과정을 거친 끝에 올해 10월 창립 예배를 앞두고 있는 나용호 목사와의 인터뷰는 개척교회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진지한 삶에 대한 고민과 하나님의 비전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에게 멘토가 누구냐고 묻자 생각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인터뷰 질문을 받고 몇 일간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는 나 목사는 '내가 사는 지역사회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 봉사한 무명의 사역자'라고 답했다. 수 년간 교제를 해온 기자에겐 '역시 나용호 목사다운 답이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왜 '무명의 사역자'들을 멘토라 생각하며 그들로 인해 어떤 인생의 답을 찾아왔을까. 다음은 나 목사와의 인터뷰.

목사님에게 있어 멘토란 어떤 의미입니까?
세가지 단어가 떠오릅니다. 삶의 영향, 닮음, 변화입니다. 멘토는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그 영향력으로 인해 내가 닮아가고 싶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멘토를 통해 내 인생이 가치 있는 모양으로 변화되는 것이죠. 때문에 멘토링의 관계는 순간적이지 않고 평생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멘토는 누구신지요?
인터뷰 질문을 받고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제 답은 '내가 사는 지역사회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봉사했던 무명의 사역자들'입니다. 지금도 젊긴 하지만 더 어렸을 때는 멋있는 목회, 폼나는 목회를 해보고 싶었죠. 멘토도 그런 성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분들을 찾았고요. 옥한흠, 하용조 목사님 같이 이름 있는 분들 말입니다. 나도 모르게 교회는 크고 멋져야 한다는 잘못된 교회관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개척을 하게 됐습니다. 막연히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개척을 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세워주시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정말 사랑하시는 분들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어쩌면 이름도 빛도 없이 평생을 사역했던 목사님들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분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 분들이 사역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분량을 최선을 다해 감당해 낸 이 시대의 영웅들입니다. 그 삶을 들어보면 그 길이 바로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니겠나 라는 깨달음을 얻곤 합니다.

제가 작은 교회를 섬기다 보니 이 분들에게 듣는 이야기가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큰 교회 목사님이나 유명한 분들의 조언은 제가 처한 현실과는 거리가 느껴집니다. 가령 한 원로목사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과거에 나는 어떤 성도와 이런 갈등을 겪었고 이런 식으로 해결했다고 조언을 해 주십니다. 그러면 저는 실제로 그런 과정들을 겪어 나가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큰 도움을 얻습니다. 유명한 분들은 코치나 티처는 될 수 있어도 저는 그 분들의 삶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역 원로목사님들의 삶은 제가 그 디테일한 부분을 보며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바로 저의 멘토입니다.

목사님은 어떤 멘토가 되고자 하십니까?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나는 여러분의 멘토입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자 하는 몸부림, 그런 몸부림을 보길 원하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결국 멘토는 멘티에게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커지면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삶을 나눌 수 있는 도구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교회 족구팀이 있는데 한번은 타 족구팀과 친선경기을 가졌습니다.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소나기가 내렸지만 즐겁게 게임을 했습니다. 게임이 다 끝나고 여전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코트에 앉아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됐죠. 이후 순두부도 함께 먹으면서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성도들이 나를 닮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 목회는 설교가 다가 아닙니다. 가끔은 그런 착각을 하곤 하죠. 멘토와 멘티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이민사회 젊은 이들은 부모 세대가 겪은 것과 언어부터 문화,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세상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명의 목회자로서 또한 아버지로서 어떠한 멘토가 돼야 하나요. 자녀들의 멘토가 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해 주십시오.
시카고에서 청년 사역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영어권 청년도 2세, 1.5세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문화적 차이 때문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거리감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닙니다. 자녀들은 문화적 차이 이전에 사랑과 관심을 원합니다.

1세인 저는 영어권 청년들에게 영어권 목회자가 오면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답하더군요. 이들은 교회에 EM 목회자를 두고 안 두고 보단 교회가 자신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길 원했습니다. 부모 자식 관계도 이런 사랑과 관심이 부각될 때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사랑과 관심은 삶의 나눔을 통해 가능한 것이구요.

먼저는 ▲함께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물론 이민 생활이 만만치 않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녀문제입니다. 일을 한 시간 줄여서라도 소통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소통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자녀를 축복해야 합니다.

멘토가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으신 책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본 훼퍼의 '나를 따르라'와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을 추천합니다. 두 책을 읽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수님을 어떻게 닮아가야 하는지 제자도와 멘토링에 대해 잘 기록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