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웃이 누군가에 대하여 예리하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행동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외면하고 도외시하고 아주 야멸차게 내쳐 버린다. 하기는 이 세상이 하도 악해서 누가 나의 이웃인가? 누가 나의 편인가? 요즘 말로하면 누가 나의 일촌인가?를 따지지 않을수 없다. 눈뜨고 있어도 코배가는 세상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믿는 이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대해서 골몰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한 이웃이 되기 위하여 발벗고 나서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내가 이 세상에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아파트 벽 하나가 천리(千里)’라는 신 속담이 있다. 벽 하나를 두고 바로 옆집이 살지만 누가 죽는지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이사 온 이웃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다 보면 잘못하다가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곧 고도속에 나를 고립시키는 행위이다.. 결국은 “내가 죽도록 괴로워도 누구 하나 찾아 갈만한 사람이 없게된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목에 힘을 주고 다니지만, 실은 모두가 철저하게 외로운 것이 사실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에게 반갑게 인사할라 치면 웬 오지랖인가 경원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니 아예 모른체 하는 것이 상책이라 한다. 그래서 시인 오광수가 "찾아갈 벗이 있다면" 이란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길이 멀어도 찾아갈 벗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문득 만나고픔에 기별 없이 찾아가도
가슴을 가득 채우는 정겨움으로 맞이해주고
이런저런 사는 속내를 밤새워 나눌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인생이지 않겠는가.

부부간이라도 살다 보면 털어놓을 수 없는 일이 있고
피를 나눈 형제간이라도 말 못할 형편도 있는데
함께하는 자리만으로도 속마음이 이미 통하고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마주함에 내 심정을 벌써 아는 벗이 있었으면 좋겠다.

좋을 때 성할 때 이런저런 친구 많았어도
힘들고 어려우면 등 돌리고 몰라하는 세상인심인데
그래도 가슴 한 짐 툭 털어내 놓고 마주하며
세월이 모습을 변하게 할지라도 보고픈 얼굴이 되어
먼 길이지만 찾아갈 벗이라도 있으면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는 벗이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벗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그는 벗없음을 한탄 하기전에 스스로 좋은 벗이 되기위하여 이웃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모름지기 사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움이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무관심이 사랑의 반대이다. 미움은 오히려 관심이 있다는 증거이다. 미움의 관심은 사랑의 관심으로 회복되고 치유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사회나 현대교회 모두 무관심으로 병들어 가고 있고 또 죽어가고 있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간에, 형제간에, 사제지간에, 상사와 부하관계에서 목사와 성도간에 성도지간에 무관심이 팽배해 있다. 곧 터질것 같은 풍선처럼 말이다. 관심은 사랑의 요소이면서 사랑의 원리요 방법이다. 특히나 하나님의 관심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관심권을 확대해야만 한다.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은 워싱턴은 이런 이웃에 대한 관심이 타 지역보다는 월등하다는데 있다. 지체 부자유자나, 홈리스 피플들이나, 차별받는 소수민족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니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더 많은 관심이 더많은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열매 맺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