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8월 15일 경기도 광주의 어느 기도원에서 성은교회 제직원들의 결의로 만들어진 국제성은복음선교회는 매월 첫 주일 3부 예배를 세계선교 헌신예배로 드리며 기도와 물질로 계속 선교에 힘쓰는 중이다. 1983년 8월 21일 인도사람 비재크마르 씽 목사 내외를 인도선교사로 파송했다. 인도에 파송된 씽 목사의 선교지를 방문하여 그 사이 두 곳에 설립된 교회를 찾아 전도집회 설교를 했을 때, 도시 변두리 시골 같은 곳에서 설교와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문 간에 현지 아주머니 네 분이 내 앞을 막고 무릎을 꿇으며 이제부터는 목사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겠으니 집과 먹을 것만 달라고 하며 두 손을 모은 채 계속 절을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답답했다. 인도의 북부 카스미르의 스리나가로 선교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비행기가 펀잡 주의 어느 공항으로 비상 착륙하더니 8명을 내리게 한 후 인도의 서부 봄베이 공항에 도착했다.
밤 1시가 지나 인터내셔널 유니온 YMCA 호텔에 들어갔다. 프론트에 약 27세로 보이는 청년이 있었고 하늘색 인쇄 종이를 주며 숙박계를 쓰라 했다. 대충 써서 주었더니 한국 서울에서 왔느냐며 다시 분홍색 더 세밀한 인쇄지를 주며 구체적으로 써 내야 방을 준단다. 다 써주고 514호실 열쇠를 받아 갔다.
아침 7시 경 식당을 갔다. 한 쪽 식탁에 영국인 3사람이 먹고 있기에 그 옆에 가서 May I sit down here, please? 했다. 좋다고 해서 앉아 그들과 환담하며 아침을 잘 먹고 방으로 계단을 올라 가는데 뒤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보니 북괴 공작원이 따라오고 있었다.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돌아서 내려갔다. 샤워하고 가방을 들고 프론트로 갔다. 체크아웃하겠다니까 그 청년이 기다리란다.
한 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길래 다시 체크아웃하겠다니까 식당에서 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란다. 주문식을 먹은 적이 없다고 해도 계속 기다리란다. 그래서 대기실에 앉아 폴란드 선전 책자가 있길래 그 책을 읽고 있는데 사람의 콧김이 내 머리카락에 감지되어 무심코 쳐다보니 글쎄 40여 세로 보이는 북괴공작원이 깜짝 놀라며 물러선다.
나도 당황하여 일어나 마주서 보니 그 사람 뿐 아니라 4명은 호텔 정문에 서 있었고 2명은 프론트 앞에 두었던 내 가방을 계단 아래쪽으로 옮겨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아찔했다. 다시 상황 점검을 하니 대장 같은 40여세의 스포츠 머리한 사람이 나를 노려보며 두 계단 아래 서 있었다.
나는 눈을 뜬 채로 정신을 집중하여 기도했다. 주님 이 부족한 종을 그 동안 사용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성은교회와 사랑하는 양떼를 주님께 맡긴다며 아내와 아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애써온 세계 선교도 계속 되게 해 달라고 이 종이 이상 더 쓸모가 없으면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되 절대로 저들에게 잡혀 평양으로 끌려가지 않게 해 달라고, 이 종이 아직도 해야할 사명이 남아있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해 주시라고 간절하고도 진지한 기도를 했다.
드디어 씽 선교사가 어느 교회에서 자고 택시를 타고 왔다. 그가 영어로 목사님, 저들은 북한 공작원이라며 일곱명이나 되는데 목사님 혼자 상대할 수 없다면서 저들은 잭 나이프와 독침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소리 안나는 작은 권총도 가졌을 것이라며 빨리 경찰을 불러야 겠다고 프론트의 수화기를 들었으나 먹통이었다.
그 뒤에 알았지만 그 청년은 북괴 공작원들로부터 매월 미화 50불 씩을 받고 투숙객 중 한국에서 목사나 교수, 의사나 판 검사가 왔을 때는 숙박계를 아주 세밀하게 쓰게 한 후 그것을 그들에게 전하면 즉시 미화 50불을 더 받는다는 것이다. 그 선교사가 내게로 와서 나의 다른 쪽 팔을 붙잡고 택시 쪽으로 끌어가려고 할 때 공작대원들은 나와 대장을 번갈아 보며 대장으로부터 행동지시를 촉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도 믿음으로 담대히 걸어가 내 가방을 들고 택시 쪽으로 갔다. 기사가 마주오며 가방을 달라고 했으나 No, Thank you. I will carry. 라고 하며 택시 뒤 의자에 가방을 밀어넣고 탔다.
선교사는 조수석에 타고 택시기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었다. 그 때 나는 해변으로 가자고 했다. 택시가 가는 데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쓰리쿼터를 타고 다른 차 4대 뒤 5번째로 따라오고 있었다. 어느 크로스웨이에서 빨간 불 정지신호가 켜지자 내가 빨리 right turn해서 가자고 재촉했고 그 차가 우회전하여 봄베이 해수욕장으로 갔다. 그 날 밤에는 숙박계를 쓰지 않아도 되는 무허가 guest house에서 자고 이튼날 공항으로 가 비행기로 떠난 일도 있었다.
<계속>
♣최근 굿뉴스미션워싱턴필름(대표 이태봉 목사)이 한국성은교회 장재효 목사의 목회 일대기를 다큐멘터리(http://www.youtube.com/watch?v=ozEoEVL7-qc&feature=player_embedded)로 제작했으며, 기독일보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된 장재효 목사의 목회 에세이 '야향(野香) 장재효(張在孝) 목사의 목회와 선교'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답답했다. 인도의 북부 카스미르의 스리나가로 선교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비행기가 펀잡 주의 어느 공항으로 비상 착륙하더니 8명을 내리게 한 후 인도의 서부 봄베이 공항에 도착했다.
밤 1시가 지나 인터내셔널 유니온 YMCA 호텔에 들어갔다. 프론트에 약 27세로 보이는 청년이 있었고 하늘색 인쇄 종이를 주며 숙박계를 쓰라 했다. 대충 써서 주었더니 한국 서울에서 왔느냐며 다시 분홍색 더 세밀한 인쇄지를 주며 구체적으로 써 내야 방을 준단다. 다 써주고 514호실 열쇠를 받아 갔다.
아침 7시 경 식당을 갔다. 한 쪽 식탁에 영국인 3사람이 먹고 있기에 그 옆에 가서 May I sit down here, please? 했다. 좋다고 해서 앉아 그들과 환담하며 아침을 잘 먹고 방으로 계단을 올라 가는데 뒤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보니 북괴 공작원이 따라오고 있었다.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돌아서 내려갔다. 샤워하고 가방을 들고 프론트로 갔다. 체크아웃하겠다니까 그 청년이 기다리란다.
한 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길래 다시 체크아웃하겠다니까 식당에서 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란다. 주문식을 먹은 적이 없다고 해도 계속 기다리란다. 그래서 대기실에 앉아 폴란드 선전 책자가 있길래 그 책을 읽고 있는데 사람의 콧김이 내 머리카락에 감지되어 무심코 쳐다보니 글쎄 40여 세로 보이는 북괴공작원이 깜짝 놀라며 물러선다.
나도 당황하여 일어나 마주서 보니 그 사람 뿐 아니라 4명은 호텔 정문에 서 있었고 2명은 프론트 앞에 두었던 내 가방을 계단 아래쪽으로 옮겨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아찔했다. 다시 상황 점검을 하니 대장 같은 40여세의 스포츠 머리한 사람이 나를 노려보며 두 계단 아래 서 있었다.
나는 눈을 뜬 채로 정신을 집중하여 기도했다. 주님 이 부족한 종을 그 동안 사용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성은교회와 사랑하는 양떼를 주님께 맡긴다며 아내와 아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애써온 세계 선교도 계속 되게 해 달라고 이 종이 이상 더 쓸모가 없으면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되 절대로 저들에게 잡혀 평양으로 끌려가지 않게 해 달라고, 이 종이 아직도 해야할 사명이 남아있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해 주시라고 간절하고도 진지한 기도를 했다.
드디어 씽 선교사가 어느 교회에서 자고 택시를 타고 왔다. 그가 영어로 목사님, 저들은 북한 공작원이라며 일곱명이나 되는데 목사님 혼자 상대할 수 없다면서 저들은 잭 나이프와 독침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소리 안나는 작은 권총도 가졌을 것이라며 빨리 경찰을 불러야 겠다고 프론트의 수화기를 들었으나 먹통이었다.
그 뒤에 알았지만 그 청년은 북괴 공작원들로부터 매월 미화 50불 씩을 받고 투숙객 중 한국에서 목사나 교수, 의사나 판 검사가 왔을 때는 숙박계를 아주 세밀하게 쓰게 한 후 그것을 그들에게 전하면 즉시 미화 50불을 더 받는다는 것이다. 그 선교사가 내게로 와서 나의 다른 쪽 팔을 붙잡고 택시 쪽으로 끌어가려고 할 때 공작대원들은 나와 대장을 번갈아 보며 대장으로부터 행동지시를 촉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도 믿음으로 담대히 걸어가 내 가방을 들고 택시 쪽으로 갔다. 기사가 마주오며 가방을 달라고 했으나 No, Thank you. I will carry. 라고 하며 택시 뒤 의자에 가방을 밀어넣고 탔다.
선교사는 조수석에 타고 택시기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었다. 그 때 나는 해변으로 가자고 했다. 택시가 가는 데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쓰리쿼터를 타고 다른 차 4대 뒤 5번째로 따라오고 있었다. 어느 크로스웨이에서 빨간 불 정지신호가 켜지자 내가 빨리 right turn해서 가자고 재촉했고 그 차가 우회전하여 봄베이 해수욕장으로 갔다. 그 날 밤에는 숙박계를 쓰지 않아도 되는 무허가 guest house에서 자고 이튼날 공항으로 가 비행기로 떠난 일도 있었다.
<계속>
♣최근 굿뉴스미션워싱턴필름(대표 이태봉 목사)이 한국성은교회 장재효 목사의 목회 일대기를 다큐멘터리(http://www.youtube.com/watch?v=ozEoEVL7-qc&feature=player_embedded)로 제작했으며, 기독일보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된 장재효 목사의 목회 에세이 '야향(野香) 장재효(張在孝) 목사의 목회와 선교'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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