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왜곡된 구원교리
기독교 핵심교리인 구원관과 구원의 단계에 대한 중요성이 희석되고 결여되어 사장된 교리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구원의 교리인 서정의 단계가 기독교 내에 통일되지 못함으로 신뢰성이 떨어져 동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신뢰성 상실로 동력이 떨어지니 구원의 단계에 따른 목적 의식이 뚜렷하지 못하므로 진취적 비전들이 상실되어 구원의 단계로 발전되어 가지 못하였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주체는 인간들이므로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구원의 성취를 ‘믿음으로 구원얻었다’는 말로 단순화 시킴으로써 값싼 믿음으로 전락시켰고 이 왜곡된 구원관은 성도들이 말씀 따로 행위 따로 이원화된 사고를 갖게 하였으며 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전략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좌표를 잃어 버리고 자신의 믿음과 신앙 생활이 현재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떤 정점에 서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막연히 구원만 외치며 고삐 풀린 말처럼 열심만 가지고 달려갔다. 확고한 구원관에 서 있지 못한 그들이 달려간 방향들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은 기복적 신앙으로 달려갔고 또 어떤 사람은 미신적 신앙으로, 또어떤 사람은 율법적 신앙으로, 또어떤 사람은 추상적 신앙으로, 또 어떤 사람은 자기중심적 신앙으로, 제 각각 방향도 모르고 열심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성경적 신앙이 아닌 마귀가 갖다준 인간중심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우상을 섬기는 인본적 신앙이다. 결국 실존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다 보니 영성이 결여되어 하나님의 인격으로 세워지지 않았고 변화가 없는 것이다. 즉 알맹이 없는 신자가 되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3. 교회 안에 만연된 인본적 사상과 세상문화
한국TV에서 ‘소는 누가 키워’ 하는 코미디 인기프로가 있다. 옛날 한국 농촌에서는 남자는 밖에 나가 일하고 여자는 집 안에서 소를 키우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여인이 그 일은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할 때 부정적 의미로 책망하는 말로서 요즈음 세상 사람들이 참된 삶의 본질을 잊어 버리고 탐욕과 쾌락과 선정적으로,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풍자한 코미디 물이다.
오늘날 교회도 다를 바 없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모형이므로 하늘나라와 그 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교회에 하나님 뜻은 없고 인간들의 생각과 사상만이 난무하고 있다. 교회의 관리와 운영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상업적인 마케팅 방법이 동원되고 또한 물질주의와 기복적 신앙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며 욕심의 그릇들은 멈출 줄 모르고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바벨탑을 쌓으며 대형화 되고 있다. 그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란 미명 하에 세상 문화가 판치고 있다.
지금은 개혁할 때이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이론과 제도와 관습들을 타파하고 순수한 성경적 제도와 성경적 방법으로 돌아가자. 우리 마음 속의 부정적인 생각이나 학자들의 개인적인 이론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말씀적인가를 살펴 과감히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자. 기독교의 핵심사상인 구원의 교리를 재정립하여 모든 교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연합되자. 구원 단계를 통한 실존사상은 그동안 막연한 하나님, 추상적인 하나님을 믿던 신앙에서 진일보하여 실제로 그 분의 모습을 믿음의 영안으로 바라보며 항상 내 곁에 계시는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하나님을 믿는 사상이다. 믿음의 선진들인 에녹이 그러하였고 노아, 다윗,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 스테반 집사 등 수많은 선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보다 더 명확하게 영의 실체로 마가 다락방에 공식적으로 오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과 대화하며 몸으로 체휼하며 그 분의 뜻을 알아 동고동락하는 실제적 믿음으로 돌아가자.
바로 성막 속에 하나님께서 예표하여 놓으신 구원의 단계들은 그 실존사상의 믿음을 이루는 통로인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서로 다른 구원관으로 반목하고 분열하여 파벌을 만들었던 교파들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통일된 구원관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자. 개혁은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는 것이다. 이제라도 개혁하자. 이것이 순리이다. 순리는 성경이요, 하나님 말씀이다. 순리는 흥하고 역리는 망한다. 하나님도 하나요, 성경도 하나요, 나도 하나요, 구원의 길도 하나이다. 바로 이 구원관은 우리의 삶이요 생명이다. 하나님이 성막 안에 숨겨두셨던 구원관으로 돌아가 그 방법대로 살아가자. 주님의 말씀대로 성막 뜰만 밟고 들나귀처럼 뛰다 ‘나는 너를 모르노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우를 범하지 말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주님이 가셨던 그 길을 우리 모두 함께 가자. 험한 준령이라도 넘고 넘어 영광의 그 자리까지 달려가자. 그리고 구원의 정점에서 승리를 외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끝)
기독교 핵심교리인 구원관과 구원의 단계에 대한 중요성이 희석되고 결여되어 사장된 교리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구원의 교리인 서정의 단계가 기독교 내에 통일되지 못함으로 신뢰성이 떨어져 동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신뢰성 상실로 동력이 떨어지니 구원의 단계에 따른 목적 의식이 뚜렷하지 못하므로 진취적 비전들이 상실되어 구원의 단계로 발전되어 가지 못하였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주체는 인간들이므로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구원의 성취를 ‘믿음으로 구원얻었다’는 말로 단순화 시킴으로써 값싼 믿음으로 전락시켰고 이 왜곡된 구원관은 성도들이 말씀 따로 행위 따로 이원화된 사고를 갖게 하였으며 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전략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좌표를 잃어 버리고 자신의 믿음과 신앙 생활이 현재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떤 정점에 서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막연히 구원만 외치며 고삐 풀린 말처럼 열심만 가지고 달려갔다. 확고한 구원관에 서 있지 못한 그들이 달려간 방향들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은 기복적 신앙으로 달려갔고 또 어떤 사람은 미신적 신앙으로, 또어떤 사람은 율법적 신앙으로, 또어떤 사람은 추상적 신앙으로, 또 어떤 사람은 자기중심적 신앙으로, 제 각각 방향도 모르고 열심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성경적 신앙이 아닌 마귀가 갖다준 인간중심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우상을 섬기는 인본적 신앙이다. 결국 실존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다 보니 영성이 결여되어 하나님의 인격으로 세워지지 않았고 변화가 없는 것이다. 즉 알맹이 없는 신자가 되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3. 교회 안에 만연된 인본적 사상과 세상문화
한국TV에서 ‘소는 누가 키워’ 하는 코미디 인기프로가 있다. 옛날 한국 농촌에서는 남자는 밖에 나가 일하고 여자는 집 안에서 소를 키우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여인이 그 일은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할 때 부정적 의미로 책망하는 말로서 요즈음 세상 사람들이 참된 삶의 본질을 잊어 버리고 탐욕과 쾌락과 선정적으로,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풍자한 코미디 물이다.
오늘날 교회도 다를 바 없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모형이므로 하늘나라와 그 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교회에 하나님 뜻은 없고 인간들의 생각과 사상만이 난무하고 있다. 교회의 관리와 운영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상업적인 마케팅 방법이 동원되고 또한 물질주의와 기복적 신앙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며 욕심의 그릇들은 멈출 줄 모르고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바벨탑을 쌓으며 대형화 되고 있다. 그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란 미명 하에 세상 문화가 판치고 있다.
지금은 개혁할 때이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이론과 제도와 관습들을 타파하고 순수한 성경적 제도와 성경적 방법으로 돌아가자. 우리 마음 속의 부정적인 생각이나 학자들의 개인적인 이론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말씀적인가를 살펴 과감히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자. 기독교의 핵심사상인 구원의 교리를 재정립하여 모든 교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연합되자. 구원 단계를 통한 실존사상은 그동안 막연한 하나님, 추상적인 하나님을 믿던 신앙에서 진일보하여 실제로 그 분의 모습을 믿음의 영안으로 바라보며 항상 내 곁에 계시는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하나님을 믿는 사상이다. 믿음의 선진들인 에녹이 그러하였고 노아, 다윗,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 스테반 집사 등 수많은 선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보다 더 명확하게 영의 실체로 마가 다락방에 공식적으로 오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과 대화하며 몸으로 체휼하며 그 분의 뜻을 알아 동고동락하는 실제적 믿음으로 돌아가자.
바로 성막 속에 하나님께서 예표하여 놓으신 구원의 단계들은 그 실존사상의 믿음을 이루는 통로인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서로 다른 구원관으로 반목하고 분열하여 파벌을 만들었던 교파들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통일된 구원관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자. 개혁은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는 것이다. 이제라도 개혁하자. 이것이 순리이다. 순리는 성경이요, 하나님 말씀이다. 순리는 흥하고 역리는 망한다. 하나님도 하나요, 성경도 하나요, 나도 하나요, 구원의 길도 하나이다. 바로 이 구원관은 우리의 삶이요 생명이다. 하나님이 성막 안에 숨겨두셨던 구원관으로 돌아가 그 방법대로 살아가자. 주님의 말씀대로 성막 뜰만 밟고 들나귀처럼 뛰다 ‘나는 너를 모르노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우를 범하지 말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주님이 가셨던 그 길을 우리 모두 함께 가자. 험한 준령이라도 넘고 넘어 영광의 그 자리까지 달려가자. 그리고 구원의 정점에서 승리를 외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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