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에 흐르는 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잃어버린 저 넓은 만주 땅의 이야기를 들으면 피가 끓습니다.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을 하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손에 땀을 쥐며 듣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빨간 티셔츠를 입고 축구대표 팀을 응원할 때는 아주 분명하게 우리 속에 흐르는 피가 똑같은 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일한 피가 흐른다고 하는 것은 한 민족 뿐만 아니라 한 가문 내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할아버지가 손주 녀석을 무릎에 앉히고서는 너의 몇 대조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셨다든지, 너의 몇 대조 할아버지는 또 무슨 일을 하셨다든지 – 옛날 우리 할아버지들은 손주에게 귀가 따갑도록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는 어떻게 살라고 따로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그 할아버지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듯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위의 사람들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무언의 압력을 가합니다.

예를 들어, 친일행적을 했던 분의 자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불미스러운 소송을 제기하거나 하는 일이 있을 때에 국민들은 그저 혀를 찹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자손들이라고 하면서, 그 피가 어디 가겠느냐고 하지요. 그러나 혹시라도 백범 김구 선생님의 자손에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국민들은 단지 혀를 차는 정도가 아니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욕을 할 것입니다. 그 만큼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까닭이 뭐겠어요? 피 때문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 속에 흘렀던 그 피의 가치가 자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보존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비슷한 이야기인데도,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독립전쟁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비록 감동을 하고 분을 내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꼈던 그런 피가 끓는 것과는 성질이 조금은 다릅니다. 미국의 노예들의 이야기, 아프리카를 침략했던 제국들의 이야기들이 우리로 하여금 연민과 분노를 자아내게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이야기들은 저 멀리 다른 나라의 이야기이기에, 우리의 피를 끓게 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법을 교회가 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법,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이런 식으로 방법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손주들에게 노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윗 왕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아이들은 따로 특별히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피가 끓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겠다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겠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합니다. 누가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의 핵심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눈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헤매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두 가지 반응이 있을 뿐입니다. 피가 끓든지 냉냉하든지! 만일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냉냉한 반응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피가 끓는 것이 당연합니다. 혹시라도 냉냉하다면, 다른 나라에 속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고로 성경은 이 땅에 단지 두 나라가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 할아버지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손주녀석처럼, 우리는 하루하루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예수님을 닮아가겠다고 다짐하면서 자라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시작과 마지막은 저 십자가로부터 입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들으면 피가 끓는 사람들, 피가 끓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은 사람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오늘도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