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청년부 자매 한명이 황당한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미꾸라지가 자라면 뭐가 되게요?” 뚱딴지 같은 물음에 나도 모르게 비슷하게 생긴 큰 물고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메기냐? 장어인가? 아니면, 용이냐?” 그러자, 그 자매가 멋쩍은 얼굴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미꾸라지가 자라면 미꾸X(엑스)라지가 됩니다!” 기상천외한 답변에 저도 한 마디 해 주었습니다. “야. 이놈아! 그럼, 완전히 다 자라면, 미꾸XX(투엑스)라지가 되냐?” 자지러지게 웃는 자매에게 걸쭉한 입담으로 너스레를 떨고 뒤돌아 서려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서 생각샘이 요동을 칩니다. 미꾸라지는 아무리 자라나도 미꾸라지 밖에는 안 되는가? “미꾸라지 용됐다!”라는 속담은 그냥 보잘 것 없는 미꾸라지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누군가가 꾸며 낸 속담일 뿐인가?

신학생 때부터 늘 하나님께 던지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후천개벽(後天開闢)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왜, 내 주변에는 그런 인물들이 없나요?” 사실, 우리가 자라면서 읽은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들은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그 싹수가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최악의 절망적인 환경 속에 있었던 위인이라 하더라도 그는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법이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하여, 위인전은 “그가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는 도전 정신과 격려보다는 “그들과 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족이다”라는 좌절감을 확인시켜주는 “운명록” 같았습니다. 미꾸라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메기나 장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용이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말장난이었습니다. 적어도 나의 청년기는 이 미꾸라지 컴플렉스에서 한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진흙탕같은 개천이 싫어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와서 다시 신학교를 나오고, 목회를 하면서도 이 못난 생각은 항상 나를 족쇄처럼 옭아매며 시간을 축내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으로 관광을 오는 한국의 동료 목사들을 맞으러 공항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가 없는지 우리는 모두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관광을 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들에게 들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소리입니다. 아직도 나는 미꾸라지인데 그들은 나를 용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미꾸라지가 자라면 용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스스로를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꾸라지와 용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스스로를 그렇게 보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