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우리는 여기서 회개에 대해 조금 더 보아야 하는데, 신약의 복음은 회개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 회개와 믿음, 이 두 가지는 매우 필요한 것이다.

회개는 내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고, 어떠한 관점을 갖고 어떠한 인생관을 가졌으며,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졌는데 이제는 바뀌어서 과거에 하나님 없이 살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산 모든 것,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않고 그분을 등지고 살았던 모든 것들을 참으로 돌이키고 그분을 우리 속에 왕으로, 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삶에 대해서 애통한 마음을 갖고 완전히 돌이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얼마나 악한 죄인이었는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는가 등 우리의 과거의 삶에 대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의 행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분명한 돌이킴과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약의 복음은 요한의 사역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요한의 사역은 회개의 사역이다.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이다(sola fide, 헬). 먼저 알 것은 회개는 회개할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다.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일부요, 구원의 일부임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믿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회개가 없이는 믿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왜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하는가? 이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개만 하고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로 믿게 해주시려면 회개의 마음을 먼저 주셔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느냐”(롬 2:4b) 회개가 구원의 조건은 아닐지라도 회개가 없이는 믿을 수 없기에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당시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 복음의 시작이 회개로 말미암아 시작됨을 볼 수 있다.

마가복음 1장 1-4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이 말씀을 보면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하고서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세례 요한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신학자들은 많은 다른 의견들을 제시한다.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파로부터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부터다. 또는 성령 강림으로부터다.’ 등등 많은 얘기를 하는데 사실 신약의 복음은 침례자 요한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도행전 10장 36-37절,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파된 화평의 복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그 화평의 복음이 요한이 세례를 반포한 후에 전파되었다.

그러니까 복음 전파는 요한의 전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1장 16절,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이 말씀에도 요한이 물로 세례 준 것이 언급되어 있다. 사도행전 13장 24절,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들어서 복음을 말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도 요한의 세례가 먼저 전파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장 21절,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이 말씀을 보면 요한의 세례는 복음에서 중대한 사건임을 볼 수 있다. 주님의 역사를 설명할 때에도 ‘요한의 세례부터 주님이 올리워가실 때까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요한의 세례를 빠뜨리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회개를 쉽게 생각하고 소홀히 하고 전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주님은 거듭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은 여기의 물이 성령의 물이라고 한다. 그럼 물과 성령은 중복된 말이 된다. 이런 중대한 말씀에서 주님이 단순한 단어의 중복을 말씀하실 리 없고, 물은 하나의 상징으로 성령은 문자대로 말씀하실 리 없다. 이 물은 세례의 물을 의미한다. 회개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이 있고 성령이 있어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믿음이 구원받는 유일한 조건이냐 할 때, 그렇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 믿음 속에는 회개가 들어 있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진정한 회개가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과거의 죄와 하나님을 떠난 그 생활들에 대한 돌이킴, 애통함, 하나님을 대적했던 삶에 대한 통회함, 자복함, 죄를 청산하고자 하는 마음, 죄를 미워하는 마음, 애통해 하는 마음이 없이 그저 ‘나는 믿었다.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하는 것은 그리 안전하지 않다. 회개가 없는 그 믿음이 다만 정신적인 동의에 불과할 뿐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첫째는 말씀을 깨달았고 둘째는 믿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 어떠어떠한 말씀에 근거해서 구원받았다.” 자, 어떻습니까? 그럴 때 대부분 구원받았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다. 회개가 빠져 있다.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금까지 행한 많은 죄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없이 다만 믿었으니까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믿는다는 말은 옳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에 있어서 세례를 통한 회개가 먼저 전파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안전하게 전해야 한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접하게 되면 거기에 참 회개가 있다. 정당한 믿음에는 회개가 있게 된다는 말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참으로 주 예수를 아는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았는가? 제가 주님을 안 뒤에,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안 뒤에 눈물을 많이 흘린 적이 있다. 나는 오늘날 소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지로는 구원받지 않았을까봐 염려된다. 내가 지난번에 불가리아에서 특별집회를 했을 때, 첫 번째 전한 메시지 제목이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 자리에도 그 비디오테이프를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때 그 말씀을 들은 뒤에 많은 불가리아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며 ‘저는 오늘 구원받은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았을 때 에서야 진정으로 내가 주님을 만났다는 느낌을 가졌다. 아마도 그 이전에는 지식적이고 교리적으로 주님에 대하여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성령께서 내 눈을 여시어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보게 하셨다. 그 때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어떤 눈물인가? 내 자신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달리 악한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놀라우신 하나님을 몰랐구나.’하는 것 때문이다. 그러한 무지하고 둔하고 악한 마음에 빛이 비췰 때 저는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주여,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당신을 계신 그대로 몰랐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방자하게 행했는지요.’ 주님을 모르니 자연히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지냈는데 그것이 다 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주님을 만난 그 자체가 나로 하여금 지난날의 방자한 삶이 다 죄뿐임을 깨닫게 한 것이다. 참되게 천국 왕을 만나는 자들은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다 회개해야 함은 하늘로부터 천국의 왕이 오셨기 때문이다. 3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요한은 스스로 나온 사람이 아니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된 자이다. 이사야가 예언했고 말라기도 예언했다. 그는 엘리야의 능력으로 임할 것이라고 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다. 이렇게 예언된 대로 그는 광야에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하나의 전파하는 소리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리’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이 소리라는 말을 주의해야 한다. 다만 그들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소리여야 한다. 여기서 소리라는 것은 그 사람과 구분된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내가 말씀을 전하는데 여러분이 다만 소리만 듣는다면 내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없어도 된다. 아무 형상을 보지 못해도 그 소리는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만 듣고 인도를 받을 수 있고 그 소리만 듣고 어떻게 해야 할 바를 알 수가 있다. 다만 소리가 되는 것은 사역자의 순수함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3장에서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라고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신랑에게 이끌릴 때 곁에 서 있는 친구는 그것을 보고 기뻐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그러한 기쁨이 충만하다고 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소리를 듣고 신랑에게 기뻐하며 가도록 하는 일을 할 뿐이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한 소리일 뿐이라고 자신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가 한 일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분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이제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주님을 맞이할 길을 예비하고 그분의 첩경들을 평탄케 해야 한다. 우리가 군대에서 높은 사람들이 부대를 시찰하러 온다할 때 입구에서부터 도로를 평탄케 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길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이다. 장마가 지면 시골길은 차가 갈 수 없다. 흙이 큰물에 씻겨 떠내려가서 길에 돌멩이들이 드러나고 골짜기가 생기고 해서 차가 지나가려면 평탄케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주 예수님이 오시는데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 높아져서 교만해져 주님을 받을 수 없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낙심하여 푹 꺼져서 믿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왠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유치한 것 같고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낮추는 것이 될까봐 주저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높아져 있는 사람인 것이다. 또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다.”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교만해서 “나는 나만큼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산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대로도 너무 좋다.”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의 길이 다 평탄케 하는 작업이 필요한 상태이다. 그래서 요한의 회개하게 하는 사역이 필요한 것이다. 4절,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요한은 누가복음을 보면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다.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 집안이다. 그러므로 그는 입는 것이나 먹는 것이 규정대로 하자면 매우 특별해야 했다. 고운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을 것이고, 먹는 것도 고운 가루라든가 또는 양고기라든가 하는 제물에 관계된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이 입은 옷은 약대 털옷이었다.

이 약대는 레위기 11장을 보면 부정한 짐승에 속한다. 그 부정한 짐승의 털을 옷으로 입은 것이다. 그리고 음식도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석청은 야생 꿀이다. 그는 광야에서 그러한 것들을 먹었다. 우리도 어렸을 적에 메뚜기를 볶아 먹은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가난할 때라 맛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들 먹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먹고 살 것이 없을 때의 일이지 일반적으로 도시인들은 메뚜기를 볶아 먹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볶아 먹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요한은 그나마 날것으로 먹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간 요한은 특별하게 처신했는데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선지자의 특이한 행동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구약에서 어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말할 때 특별하게 무언가를 시사해 주는 복장을 했고 또 무언가를 시사해 주는 행동을 했다. 시사해 주는 그것이 일종의 메시지였다. 에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등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지금 요한이 성령이 충만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러한 옷을 입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메시지가 있으신가보다고 느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의 경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경륜의 변환이다. 종래의 율법을 따른 제사장이지만 이전과 다른 어떤 것을 보여준다. 구약의 경륜이 아니고 더 이상 율법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요한이 있은 후로는 그 모든 과거에서 철저히 전환하는 것이다. 이전 것이 아니고 이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입은 옷이나 먹는 것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새 시대가 열렸다, 하늘 왕이 오신다’ 하는 메시지를 일단은 그가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유동근 목사는...

유 목사는 대전고와 충남대학교·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美 퍼시픽 신학대학원(Th.M., D.D), 워싱턴 신학대학원(Th.D) 등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온누리선교교회 담임목사, 美 퍼시픽 신학교 교수, 국제선교 신학, 신학연구원(IMC) 학장, 예장 국제선교연합총회 총회장, 글로벌부흥협의회 총재 등을 맡고 있다.현재까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등 신약 전권을 강해해 책으로 펴냈고 창세기, 모세5경, 여호수아·룻기, 사무엘상하, 전도서·아가서, 이사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등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