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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동네 주민들의 경제사정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교회 등록된 가정 중에도 끼니 간 데 없이 굶어야 하는 형편들이 있어서 부득이 젖은 국수나 밀가루 포대 혹은 쌀을 8kg씩 사서 허기를 면하도록 배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내어 신도 가정을 두루 돌며 가마니를 튿어 부엌 문으로 가리웠기 때문에 손으로 밀고 부뚜막을 살펴보면 솥, 냄비가 음식을 해 먹었는 지 아니면 양식이 없어 솥과 그릇들이 깨끗이 보존되고 있는 지를 확인하여 굶주리는 가정 마다 양식을 공급할 수 밖에 없었다. 2011년 5월 17일까지 나누어 준 쌀이 80kg들이 쌀1300가마 이상을 전달했다.
옥수동 윗 동네 삼거리에 있었던 이 모씨의 쌀 가게에서 8kg 쌀 한 봉지를 사놓고 구역장에게 전화로 나오게 하고 이 쌀을 어느 신도 가정에 전달해 주시라고 당부하면서 목자가 사 준 것이라고 하면 받지 않고 돌려보낼 것 같으니 집사님이 전하는 것처럼 해 달라고 말하니 그 구역장 집사님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정 그러시면 제가 한 봉지 더 사서 두 봉지를 전달하겠다고 했을 때 목자는 가슴이 찡 하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즉시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게 되고, 그 집사님께서 쌀 두봉지를 가슴에 안고 산 언덕 길을 올라 그 집에 가서 전달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왜 그렇게 흐느끼며 울었는지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콧잔등이 시큰 하며 뜨거운 눈물이 솟구친다.
그 무렵 내 나이 40세도 되지 못했는데 교회 부흥을 위한 목양 사역에 전심전력 하다보니 육신의 건강 같은 것은 생각 지도 못했다. 신장이 173cm인 나의 체중은 49kg까지 허약해져 있었고 약수동으로 심방을 가다가 약수동과 옥수동 경계지점 언덕에 이르면 장충 체육관 쪽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뒷걸음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런 나를 목자라고 은혜 받은 집사님이 약 병아리 백숙을 만들어 저녁 시간에 사택으로 가져와 목사님이 너무나 야위어서 마음이 아파 사모님과 같이 드시고 기운 내시란다. 소반에 올린 냄비뚜껑을 여는 순간 구수한 냄새에 군침이 도는 동시에 그 백숙탕을 잡수셔야 할 사람의 모습이 어느새 상 머리에 나타났다. 목자는 굶어도 병들고 허약한 양 떼부터 먹여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심장이 내 심장에 발동했다.
조금 있다가 잘 먹고 냄비는 내일 돌려드릴 것이니 어서 집으로 가셔서 가족 함께 저녁을 드셔야 하지 않겠냐고 재촉했다. 빨리 집사님이 가셔야 얼른 그 음식을 잡숴야 할 분에게 전달할 수 있으니 집에 어서 가시기를 강권했지만 그 집사님은 되려 푹 눌러 앉으면서 저를 빨리 돌려보내고 이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주려 하시는 줄 제가 왜 모르겠느냐며 제가 보는 앞에서 목사님 내외 분이 다 드시는 것을 본 후에야 갈 것이란다.
하는 수 없이 작은 그릇에 조금씩 떠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이고 감사의 말씀을 연발하며 우리가 잘 먹을 터이니 이제 그만 가셔도 된다고 애원하다 시피 집사님을 귀가하게 한 후 집사람을 시켜 길을 둘러서 임신 빈혈증으로 영양실조가 되어가는 Y집사님께 배달하고 우리 내외는 그 날 저녁을 굶으면서도 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뜨거운 눈물의 감사를 드렸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적 지혜로 몹시 가난한 가정에 쌀을 사서 전달할 때 형편이 다소 나은 집사님으로 배달하게 한 것이 여러 집사님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며 형제 사랑에 힘 쓰게 함으로 교회는 목양 지간 뿐만 아니라 성도 상호간에도 사랑과 정이 깊어 피차 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뜨겁게 뭉치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 교회 천국의 모습이 되어갔다.
<다음편에 계속>
♣최근 굿뉴스미션워싱턴필름(대표 이태봉 목사)이 한국성은교회 장재효 목사의 목회 일대기를 다큐멘터리(http://www.youtube.com/watch?v=ozEoEVL7-qc&feature=player_embedded)로 제작했으며, 기독일보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된 장재효 목사의 목회 에세이 '야향(野香) 장재효(張在孝) 목사의 목회와 선교'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달 동네 주민들의 경제사정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교회 등록된 가정 중에도 끼니 간 데 없이 굶어야 하는 형편들이 있어서 부득이 젖은 국수나 밀가루 포대 혹은 쌀을 8kg씩 사서 허기를 면하도록 배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내어 신도 가정을 두루 돌며 가마니를 튿어 부엌 문으로 가리웠기 때문에 손으로 밀고 부뚜막을 살펴보면 솥, 냄비가 음식을 해 먹었는 지 아니면 양식이 없어 솥과 그릇들이 깨끗이 보존되고 있는 지를 확인하여 굶주리는 가정 마다 양식을 공급할 수 밖에 없었다. 2011년 5월 17일까지 나누어 준 쌀이 80kg들이 쌀1300가마 이상을 전달했다.
옥수동 윗 동네 삼거리에 있었던 이 모씨의 쌀 가게에서 8kg 쌀 한 봉지를 사놓고 구역장에게 전화로 나오게 하고 이 쌀을 어느 신도 가정에 전달해 주시라고 당부하면서 목자가 사 준 것이라고 하면 받지 않고 돌려보낼 것 같으니 집사님이 전하는 것처럼 해 달라고 말하니 그 구역장 집사님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정 그러시면 제가 한 봉지 더 사서 두 봉지를 전달하겠다고 했을 때 목자는 가슴이 찡 하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즉시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게 되고, 그 집사님께서 쌀 두봉지를 가슴에 안고 산 언덕 길을 올라 그 집에 가서 전달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왜 그렇게 흐느끼며 울었는지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콧잔등이 시큰 하며 뜨거운 눈물이 솟구친다.
그 무렵 내 나이 40세도 되지 못했는데 교회 부흥을 위한 목양 사역에 전심전력 하다보니 육신의 건강 같은 것은 생각 지도 못했다. 신장이 173cm인 나의 체중은 49kg까지 허약해져 있었고 약수동으로 심방을 가다가 약수동과 옥수동 경계지점 언덕에 이르면 장충 체육관 쪽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뒷걸음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려웠던 시절 70년 대 당시 교인들은 벽돌을 날라 푼돈을 벌어쓰기도 했다. | |
조금 있다가 잘 먹고 냄비는 내일 돌려드릴 것이니 어서 집으로 가셔서 가족 함께 저녁을 드셔야 하지 않겠냐고 재촉했다. 빨리 집사님이 가셔야 얼른 그 음식을 잡숴야 할 분에게 전달할 수 있으니 집에 어서 가시기를 강권했지만 그 집사님은 되려 푹 눌러 앉으면서 저를 빨리 돌려보내고 이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주려 하시는 줄 제가 왜 모르겠느냐며 제가 보는 앞에서 목사님 내외 분이 다 드시는 것을 본 후에야 갈 것이란다.
하는 수 없이 작은 그릇에 조금씩 떠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이고 감사의 말씀을 연발하며 우리가 잘 먹을 터이니 이제 그만 가셔도 된다고 애원하다 시피 집사님을 귀가하게 한 후 집사람을 시켜 길을 둘러서 임신 빈혈증으로 영양실조가 되어가는 Y집사님께 배달하고 우리 내외는 그 날 저녁을 굶으면서도 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뜨거운 눈물의 감사를 드렸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적 지혜로 몹시 가난한 가정에 쌀을 사서 전달할 때 형편이 다소 나은 집사님으로 배달하게 한 것이 여러 집사님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며 형제 사랑에 힘 쓰게 함으로 교회는 목양 지간 뿐만 아니라 성도 상호간에도 사랑과 정이 깊어 피차 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뜨겁게 뭉치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 교회 천국의 모습이 되어갔다.
<다음편에 계속>
♣최근 굿뉴스미션워싱턴필름(대표 이태봉 목사)이 한국성은교회 장재효 목사의 목회 일대기를 다큐멘터리(http://www.youtube.com/watch?v=ozEoEVL7-qc&feature=player_embedded)로 제작했으며, 기독일보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된 장재효 목사의 목회 에세이 '야향(野香) 장재효(張在孝) 목사의 목회와 선교'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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