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가나안 사람들의 풍습과 규례를 따르지 말고 (레 18:3), 가나안 사람들의 딸들을 아내로 삼지 말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출 34:15-1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토착민의 문화와 종교적인 영향을 받으므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일에 실패하였다 (삿 3:6, 왕하 17:7-1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걸림이 되었던 가나안 종교와 문화는 우가릿 문서 (Ugarit Letter)를 통해 잘 이해할 수 있다. 우가릿 문서란 지중해 연안, 라스 샤므라 유적지 (Tell Ras Shamra)에서 발견된 쐐기 문자로 기록된 토판을 말한다.

1928년 봄, 한 시리아 농부는 밭을 갈던 중에 고대의 무덤을 발견했다. 농부는 이 사실을 당시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던 프랑스 정부 산하 고대 유적 사무실에 연락하였다. 그래서 몇 고고학자들이 발견된 고대의 무덤 주위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1929년 3월 클로드 쉐퍼 (Claude F. A. Schaeffer) 박사를 단장으로 유적지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이 시작된 지 처음 6 주간은 몇 개의 고대 무덤만 발견될 뿐 두드러진 유물은 없었다. 이에 실망한 고고학자들은 발굴 지역에서 약 1마일 정도 떨어진 작은 언덕을 발굴하기로 결정하였다. 지역 사람들은 그 언덕을 라스 샤므라 (Ras Shamra)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 ‘회향의 머리’란 뜻이다. 회향이 언덕 전체를 덮은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고대에 우가릿 (Ugarit)으로 불렸던 라스 샤므라는 주변으로부터 약 20미터 높은 언덕으로, 전체 크기는 약 70 에어커에 이른다. 고고학자들은 라스 샤므라를 발굴하면서 대단히 놀랐다. 발굴하는 곳마다 엄청난 유물들이 속속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우가릿 왕실 무덤, 두 개의 거대한 신전, 고대 우가릿 도시의 기념비적인 건축들, 왕궁, 각종 생활 도구들, 우가릿과 국제 관계에 있었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힛타이트, 크레타로부터 유입된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발견된 모든 유물들은 고대에 우가릿 도시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라스 샤므라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유적은 서적 보관소 (library)이다. 서적 보관소에서 고대 근동의 몇 개의 언어로 기록된 수 천 개의 토판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이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알파벳 쐐기 문자인 우가릿어 토판도 포함되었다.

서적 보관소에서 발견된 토판들을 통하여 우리는 고대 가나안의 역사와 문화, 가나안 종교의 특징,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 단어의 어원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우가릿어 알파벳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대량의 토판이 발견된 서적 보관소는 고대 도시 우가릿에 세워졌던 두 신전인 바알 신전과 다곤 신전 사이에 위치해 있다.

클로드 쉐퍼 (Claude Schaeffer)는 1940-1947년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공백을 제외하고 1929년부터 1970년까지 라스 샤므라의 유적지를 발굴하였다. 쉐퍼는 이곳에서 시대가 다른 다섯 개의 유적 층을 발굴하였다. 가장 오래된 다섯 번째 층은 신석기 이전 시대의 층으로써 이때는 토기 이전 시대에 속한다 (pre-pottery period of Neolithic period). 이곳에서는 부싯돌과 뼈로 만든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라스 샤므라의 네 번째 층은 금석 병용기 시대에 속한다. 이 층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할레이션 시대 (Halation period)에 속한 채색 토기가 발견되었다. 세 번째 층은 주전 3천 년대 중반에 속한 때로 당시 도시는 큰 화재에 의해 멸망하였다. 화재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 층 위에 주전 약 2100년까지 정착 역사는 계속되었다. 세 번째 층의 마지막 시기는 갈릴리 호수의 남쪽과 이스르엘 평야 인근에서 많이 발견된 히르벳 케락 도기 (Khirbet Kerak ware)와 관련이 있다. 라스 샤므라의 마지막 두 개의 층 (2100-1500 B.C. 그리고 1500-1200 B.C.)은 시리아와 가나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 층이다. 이때에 라스 샤므라는 우가릿으로 불렸다. 아마도 토판에 기록된 바알 신화와 종교적 관습은 두 번째 층에 정착했던 우가릿 거주민들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가릿의 많은 토판은 마지막 층에서 발견되었다. 라스 샤므라의 마지막 층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모든 면에서 가장 번영을 이루었던 시대였다.

주전 15세기 이후 우가릿은 이집트와 힛타이트 두 제국 간에 정치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므로 경제적으로 안정과 평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우가릿의 번영의 절정기는 주전 약 1275년, 이집트와 힛타이트 간의 카데쉬 전쟁 (battle of Kadesh) 이후이다. 두 제국 간의 큰 전쟁으로 인한 힘의 공백이 주변 도시 국가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이다. 그러나 우가릿은 주전 13세기 말과 12세기 초, 해양 민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집트 문서에 따르면, 이 침략자들은 발칸 반도와 흑해 북쪽에서 이주해 왔다고 기록되었다 (Balkans and plains north of the Black sea). 우가릿을 멸망시킨 해양 민족은 이집트와 가나안에도 큰 위협이 되었다. 당시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하던 시대로 우리는 성경에서 해양 민족의 하나인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큰 위협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양 민족은 내륙에 정착할 목적으로 지중해 연안의 이집트, 팔레스틴, 레바논, 시리아 여러 도시들을 침략하여 지중해 연안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우가릿의 마지막 왕은 암무라피 (Ammurapi)이다. 암무라피는 힛타이트의 수필루리우마 2세 (Suppiluliuma II)와 동시대 인물이다. 암무라피 (Ammurapi)의 정확한 통치 연한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알라시아 (Alasiya)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 탄원서를 통해 우가릿의 마지막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보십시오, 나의 아버지여, 적의 배들이 여기에 와 있습니다. 나의 도시들은 불에 탔으며 그들은 내 나라에 악한 일들을 행했습니다. 나의 군대와 전차들은 하티 (Hatti)의 손에 있으며 나의 모든 배들은 Lukka에 있는 것을 내 아버지께서는 알지 못하십니까? 그러므로 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 아시기를 원합니다. 적의 배 일곱 척이 여기에 와서 많은 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가릿을 돕는 구원군은 파견되지 않았다. 방사성 탄소 연대 (Radiocarbon) 측정에 따르면 우가릿은 주전 1192-1190년 사이에 멸망하였으며 이후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했다. 주전 10세기 약간의 흔적, 주전 6-5세기 그리스의 일부 상인들이 정착했지만 우가릿은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그리고 3천년이 지난 1929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우가릿의 화려했던 옛 흔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가릿 문서에는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바알 신화 (Baal myth)가 기록되어 있다. 바알 신화는 주전 약 1400-1200년에 기록된 창조 신화이다. 고대 근동의 다른 고대 창조 신화처럼 바알 신화 역시 질서 (선)와 무질서 (악) 간에 싸움을 말하고 있다. 바다의 신인 얌 (Yam)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바알 (Baal)은 연회를 베풀고 신들을 초대한다. 그러나 그 연회에 초대 받지 못한 죽음의 신인 못 (Mot)은 대단히 분노한다. 분노한 못의 뜨거운 호흡은 감람나무와 땅의 모든 실과를 불태운다. 바알은 못에게 사신을 보내어 복종할 것을 약속하므로 분노를 잠재우지만, 후에 아낫 (Anat)은 못을 체포하여 칼로 그의 몸을 둘로 쪼개어 불에 태우고, 맷돌로 갈아 들에 뿌린다. 그리고 그의 몸은 공중의 새들의 먹이가 된다. 그리고 아낫은 가나안의 최고의 신인 엘 (El)에게 꿈을 꾸기를 요청한다. 만약 엘이 흉년의 꿈을 꾸면 바알은 죽은 것이고, 만약 하늘에서 기름이 비처럼 내리고 꿀이 강처럼 흐른다면 바알은 부활한 것이라고 말한다. 엘은 두 번째의 꿈을 꾸게 되고 그래서 엘은 바알이 부활한 것을 알고 기뻐한다.

이 같은 바알 신화는 가나안의 계절의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다. 가나안의 계절은 건기와 우기 두 계절로 되어 있다. 못이 분노하므로 오랜 기간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와 바알이 부활하여 비가 강처럼 흐르고, 나무마다 실과가 무성하게 열리는 때는 우기 곧 농사 시기로 이해하기 때문에 가나안에서는 바알을 무시한 채 살 수 없는 것이다. 바알 종교는 가나안에 살던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든 가나안 사람이든 가나안 땅에서는 누구도 바알의 종교에 자유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런 가나안 종교에 영향을 받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토록 강조하셨던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바알 종교에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와 아합이었다. 오므리는 시돈 왕 엣 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들 아합과 정략 결혼을 시키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열심으로 숭배하였다 (왕상 17:31-33, 왕상 18). 그리고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는 남쪽 유다 왕국의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남쪽 예루살렘도 북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열심히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달랴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는 예루살렘의 바알 숭배는 절정에 이르렀다 (왕하 8:25-27). 그리고 아달랴의 아들 아하시야가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는 왕이 될 다윗의 모든 후손을 진멸시켰다 (왕하 11:1). 아달랴에 의해 다윗 성에서 피비린내가 날 때, 한 지혜로운 여인에 의해 아하시야의 한 살 짜리 아들 요아스만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젖먹이 요아스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6년간 울음소리도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숨긴 채 지내야 했다. 이 모든 불행한 사건의 중심에는 바알이 개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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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