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단어 선정위원이 된다면 나는 당연히 ‘치열하다’는 동사를 꼽겠다. 귀에 못박히도록 자주 듣게 되는 치열하다라는 말에 진저리가 나다 못해 이제는 反感까지 가지게 된다. 이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사회적 병리현상이야 말로 얼마나 세상이 점점더 각박해 져 가는지 보여주는 실증이다.

어떤 문인들의 모임에 객으로 참석하여 詩作에 대한 열심을 경청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원로 여 시인이 이제 문인의 길에 들어 선 분들에게 치열한 습작을 권하면서 치열하다는 말을 여러번 반복하는 것을 듣고 매우 거북하였다. 시인들마저 치열한 심정과 경쟁이 없이는 좋은 시와 글을 쓰지 못할 세상이 되었는가? 하는 진한 아쉬움과 탄식이 절로 나왔다.

서울 시장 선거에 대패한 여당 대표가 의원총회에서 치열한 각성과 치열한 투쟁을 요구하는 것은 애교로 받는다 손 치더라도 왜 시인의 마음까지 치열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세상이 되 가고 있는 것일까?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화두인 동시에 영적 지도자들에게는 책임을 묻는 도전이다.

치열한 세상을 보다 평안으로 인도해야 할 이들이 어쩌면 더 치열함을 조장하는 세력이 되고나 있지 않은지 자성할 일이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자기의 귀에는 ‘치열이라는 단어가 파괴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고 했는대 매우 동감이 가는 말이다. 예를 들어 프로 골프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도 치열하게 공을 칠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 치열함이 골프메이트까지 잃게 하는 것이라면 그 치열함은 파괴이다.

치열하다는 말에 열을 내는 사람들은 한 발 물러섬과 부드러움과 겸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일찍 말하기를 “물러섬이 없이는 나아감이 없다” 하지 않았는가! 이세상은 앞으로 더욱 팍팍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될것이 분명하다. 선동가들은 범인들에게 치열한 삶을 요구하고 설복할 것이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그런 궤변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세상이 각박할수록 부드러운 윤활유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치열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꿈은 성경이 말하는대로 평화의 대사가 되는 데 있다. 이것은 나는 가꿈의 창조행위리고 부르고 싶다. 나를 참된 나가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치열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며 잔잔함이다.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끝맺음을 하였다는 안도의 숨을 쉬며 평안의 눈을 감으려면 어떻게 치열하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평안을 전하고 실천하였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2011년이 치열한 劍舞의 경연장이 되었다면 이제 밝아오는 새해는 교계만이라도 부드럽고 온유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 치열함과는 상관없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게 될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