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학에서는 자주 동정과 감정이입을 구분하라고 가르친다. 나도 상담학 강의할 때마다 이 두 가지가 가지는 의미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 말의 동정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로‘sympathy’가 있다. 이것은 아픈 사람이나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상처받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려는 마음은 아주 귀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차가운 겨울에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할머니를 보고 불쌍히 여겨 돈을 주거나 지하철에서 껌 파는 아이가 가여워서 껌 한 통 사주는 등의 행위들은 일종의 동정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감정이입은, ‘empathy’라고 하는데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데 그치지 않고 그가 당한 아프고 상처받은 일들을 함께 아파하며 이해하려고 애쓰는 행위를 말한다. 아픔을 당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그치지 않고, 듣는 가운데 얼굴, 말투, 표정, 목소리 등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 마음을 품으며 그의 삶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아무튼 동정과 감정을 간단하게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 한편,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특권’ 혹은 ‘우월’의식의 존재 여부이다. 우리는 남을 동정하면서 나는 그와 같은 불우한 상황이나 형편에 처해 있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기는 마음을 갖기가 얼마나 쉬운 지 모른다. 필자가 미국의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미국인들과 함께 공부하고 상담훈련을 받으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대부분의 미국 친구들은 그저 내가 자기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느끼지 않을 정도의 연민을 갖고 나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만나다 보면 나를 한 이방인에 대한 백인으로서의 친절 혹은 환대 차원에서 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그러다가 어쩌다 정말 고마운 백인 동료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감정이입적인 자세로 나를 대하는 친구다. 나를 단지 한국인이 아닌, 그냥 자기들과 같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어려운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상담훈련을 받는데 겪는 언어적, 문화적, 그리고 신앙적인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힘든 부분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내 마음을 느끼려고 하는 친구들이 지금도 그리울 때가 있는 것이다. 백인이자 미국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특권 (privilege)의 파괴적인 면을 잘 인식하면서 자기와 다른 이들을 존중하려는 그 마음과 태도를 가진 그들이야말로 목회상담가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교회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바로 동정이 아니라 감정이입의 마음이다.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단지 동정의 마음만 가지고 있을 때,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고 만다. 교회가 세상을 정죄하는 입장에 처하기 쉽다. 세상은 나와는 다른 죄 많은 곳이기에, 이 세상의 고통과 아픔과 죄악된 모습들을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며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총을 갈망하는 노력조차 무의미하다고 여기기 쉽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인간의 고통과 상처와 아픔, 그 가운데 깊이 드리운 어둠과 악의 세력들에 대해서 감정이입적인 개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 억청이 무너져 내리는 그 순간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와 감정이입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옆에서 울며 힘들어 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단순한 동정이 아닌, 진정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마스, 예수님 나심의 의미가 아니겠는 가.

문의) 장보철 교수: ptheology@gmail.com